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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회 가을

가슴으로 밀고 들어온 내 그림자

by 생각전사

당신의 가을은 어떤가요?


갈잎이 비처럼 떨어진다. 봄과 여름을 머금은 낙엽들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난다. 아, 지난여름에는 비에 젖고, 이 가을에는 낙엽에 젖는구나.


오늘 나는 평소와 달리 강 건너 길을 달려보기로 했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길이었다. 초입부터 가을바람에 춤추는 억새가 “왜 이제 왔냐”며 반긴다. 시멘트 포장길은 자전거 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다니던 옛길은 좁고 군데군데 포장이 되지 않은 험로였다. 후회는 없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일 뿐이다.


그래서 강 건너편을 향해 소리쳐 본다. “여기 또 다른 길이 있어!” 하지만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모두 제 갈 길을 간다.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가는 길만 알게 되고, 아는 길만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숙명의 길이라고 여긴다.


나는 어느덧 65번째 가을 속에 있다. 가을조차 마주하는 자에게는 선명히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강 건너 길을 탐색하고자 했다. 한 번도 다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 역시 여름은 물러가고, 가을이 점령군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마치 가을 사령관이나 된 듯 가을 세상을 사열하며 한참을 달렸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그런데 길 초입부터 누가 내 뒤를 계속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인기척은 아니었다. 돌아보니 그림자, 바로 내 그림자였다. 가면 따라오고, 멈추면 따라 멈추었다. 순간 가슴이 아련해졌다. “가을이 가도 너는 남겠구나.” 65번째 가을을 가슴으로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여태껏 가을은 결실과 행복이었다. 마당 옆 아름드리 밤나무의 알밤 떨어지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고, 이른 아침 알밤 줍기는 기대와 환호로 넘쳐났다. 낙엽 태우는 연기에 취하고, 탈곡기에서 벼알이 떨어지는 소리, 도리깨질에 콩알이 튀는 소리에 마음이 풍성해졌다. 까까머리 시절, 바둥바둥 잣나무 꼭대기에 올라 잣송이를 따면 외숙모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가을에 첫아이가 태어났고, 계급은 가을을 거치며 하나씩, 하나씩 올라갔다. 새롭고 기쁜 문은 늘 가을에 열리곤 했다. 그래서 가을은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 차 있다.


나의 65번째 가을은 예전과 같지 않다. 바람이 가을 잎새에 스치는 소리와 낙엽의 바스락 거림이 세월 따라 점점 크게 들려서일까? 아니면 해묵은 것의 식상함과 늘어난 숫자에 비해 더 가벼워지는 무게감, 물기 마른 삭은 가지가 허공을 두드리며 내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 때문일까?


그런 내게 오늘 만난 그림자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특별히 그림자가 속삭이는 영원의 약속이 거짓일 리 없다는 믿음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자. 빛이 나를 비추면 어김없이 내 뒤를 따르고, 빛이 사라지면, 그는 내 마음속에서 늘 앞장선다. 나와 뗄 수 없는 가장 친밀하고도 든든한 친구이자, 내 존재의 증명. 예전에 몰랐던 그림자를 나는 이제라도 좋아하기로 했다. 낙엽은 지고, 가을은 가도 그는 남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를 떠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올해 당신의 가을은 무엇이 떠나고, 무엇이 남으려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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