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결심
계획대로 된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계획된 길을 가고자 했다. 생각이 먼저라고 믿었다.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계획하지 않은 곳에, 내 생각보다 더 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길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제 안다.
가을길로 나섰다. 여름이 아직 남은 속에서 단풍이 서서히 물들어간다. 성급한 잎새는 이미 길 위를 구르고, 살랑이는 억새풀은 청명한 하늘을 희롱한다. 볕은 따뜻하나 음달은 썰렁하고, 을씨런 바람이 옷깃 틈새를 파고든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아는 길과 모르는 길이 뒤섞였다. 아는 길은 모르는 길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게 해 줬고, 모르는 길은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렸다. “아, 여기가 거기구나.” 늘 아는 길만 다니던 내게 모르는 길은 3차원적 사고를 하게 했다. 되레 내가 아는 길보다 넓고 평평했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녔다. 다만 그 속에는 불확실성과 여러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빠른 결정은 빠른 결과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스무 살에 어떤 위험 요소를 감지하고, 내 길을 전광석화처럼 결정했다. 그리고 그 길로 쭉 달렸다. 펼쳐진 상황과 여건 속에서, 내 생각이 닿을 수 있는 한 최선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다. 어떤 건 실패했고, 어떤 건 성공했다.
이제 남은 길을 생각해 본다. 아는 길보다 모르는 길을 가는 궁리를 해본다.
AI, 양자컴퓨터, 반도체, 원전, 희토류, 자율형 자동차, 로봇…. 모두 나에겐 낯설고, 그래서 더 흥미롭다. 문외한의 시선이라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 문득 깨닫는다. 모르는 길이, 내가 스무 살에 도망쳤던 그 길로부터 쭉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모르는 길의 초입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