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이 기쁘지 아니할 때의 결심
어느 대학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자신의 퇴임식 대신, 그 대학 총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저녁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나의 시간과 노력의 덕을 보았던 후배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대화와 시선은 자연스럽게 과거보다 미래를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누구도 의도적으로 외면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음의 자기 시간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불현듯 머리를 스친 감정이 있었다. 바로 허무였다.
살다 보면 이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마음이 텅 빈 순간이 찾아온다. 지난 성취 앞에서도, 또 다른 새로움의 문턱에서도 가슴은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익숙했던 관계와 역할조차 빛이 바랜 사진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이러한 허무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라기보다, 삶이 깊어져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징후에 가깝다.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인간이 성숙으로 건너가는 문턱으로 바라보아 왔다.
허무는 흔히 “아무 의미도 없다”는 체념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니체는 허무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에게 허무란 가치가 붕괴된 이후에 도래하는 공백이며,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었다. 기존의 신념과 도덕, 삶의 이유가 힘을 잃을 때 인간은 공허 속에 서게 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을 다시 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허무는 종말이 아니라 재출발의 조건이었다.
허무는 텅 빈 충만으로의 시작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난 시간과 시절 인연과의 멀어짐을 동반한다. 함께 걸어왔던 이름들, 나를 설명해 주던 직함들, 익숙했던 관계의 온도에서 한 발 물러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을 바깥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멀어짐은 단절이 아니라 거리 두기다. 너무 가까워 초점이 흐려졌던 것들이, 조금 멀어졌을 때 오히려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 지점에서 고독은 피할 수 없다. 허무는 언제나 고독을 데리고 온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고독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단독자’는 세상과 단절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기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를 선택하는 인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절망은 파멸이 아니라, 자기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존재의 통증에 가깝다.
따라서 이 고독은 삶을 파괴하는 병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의 판단과 수많은 관계, 그간의 삶의 방식에서 서로 뒤엉킨 부차적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시간이다. 말하자면 고독은 주체적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동안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온 나는, 이 고독 속에서 비로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허무의 상태를 ‘부조리’라 불렀다. 세계는 침묵하고, 인간은 의미를 갈망한다. 이 간극에서 허무가 발생한다. 그러나 카뮈는 허무 앞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태도”를 인간의 존엄으로 보았다. 허무를 제거하려 애쓰기보다, 허무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결단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허무를 존재론적 각성의 계기로 이해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고 있음’ 그 자체를 자각한다. 목적과 성취의 목록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은 하나의 과정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여기에서 선택하고, 걸어가고, 다시 멈추는 일. 허무는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무는 삶이 자동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세운다.
결국 허무는 삶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기준과 과거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다시 써 내려가라는 어느 날 찾아오는 인생의 시간표다. 허무에 이른 삶은 이전보다 가벼워지지만, 그만큼 삶에 더 견고해져야 한다. 스스로 의미를 찾고, 그 토대 위에 삶을 다시 쌓아 올릴 때, 허무를 통과한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시간이 아닌 자기 삶의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