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길, 그 도전의 길을...
프랑스의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푸른 초원을 지나 동쪽으로 한참 달리자 점점 산세가 높고 험준해지기 시작했다. 알프스 산맥에 들어선 것이다.
알프스 산맥은 거리가 800km이고, 너비가 200km인 초승달 모양이다.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고, 그르노블에서 프랑스를 거쳐 동쪽으로 스위스 중부와 남부까지 이어진다. 범위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동쪽으로 아드리아해와 슬로베니아까지,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북부로, 북쪽으로는 독일 바이에른 주 남부 국경까지다.
산맥은 몽블랑에서 남쪽의 마터호른과 몬테로사까지의 론 계곡의 빙하 골짜기와 북쪽의 베른 알프스로 나뉜다. 산의 평균 높이는 2500m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4,810m의 몽블랑과 4,049m의 피츠 베르니나, 두 번째는 4,634m의 몬테로사와 3,905m의 오르틀러이다.
이 높은 산맥은 인간의 발길을 막는 구실을 했지만 비범한 인간에게는 도전의 장소가 되었다. 페니키아(Phoenicia) 제국이 아프리카에 세운 나라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Poeni, 라틴어로 페니키인이라는 뜻)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코끼리 37마리와 3만 8천 보병에 8천의 기병을 지휘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한니발은 기상과 지형의 악조건에서 포도주로 만든 식초를 부어 바위를 깨뜨려 길을 내며 주야로 달려드는 고산지대 원주민과 싸우는 악전고투 끝에 이탈리아에 당도했다. 그 역경 속에서 병력은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코끼리는 1마리로 줄어들었다. 한니발 장군은 이탈리아 지역을 옮겨 다니며 로마군과 대적했다. 특히 기원전 216년 칸느전투는 한니발을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니발 군대 5만 명은 칸느에서 로마의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과 맞붙게 되었는데, 한니발은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해 뒤로 후퇴하게 하다가 그 좌우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여 일거에 포위 공격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로마군을 섬멸했다. 전투결과 로마군 7만 명을 죽이고, 1만 명의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뒀다. 한니발은 병력 6,000명을 잃었다. 이전까지 전투는 고대 그리스 밀집 대형(Phalanx, 팔랑스)을 갖춘 채 오직 정면대결의 형태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한니발이 대형에 변화를 주는 새로운 방식의 전법을 사용함으로써 포위와 기동, 섬멸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그래서 이 칸느 전투는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알프스를 넘은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다. 바로 프랑스 나폴레옹이다. 1799년 11월 9일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1800년 봄에 그는 예비군을 이끌고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알프스를 가로질러 갔다. 미하엘 폰 멜라스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제노바의 마세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알파인 횡단 루트를 택함으로써 기습을 달성하고자 했다. 결국 제노바는 성공적으로 함락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재편성하기 전에 교전을 시도하여 마렝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을 없다고 외친 영웅 나폴레옹의 탄생이다.
그 후 나폴레옹을 추앙하는 이미지와 이야기는 그를 더욱 불세출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중 ‘생 베르나르 고개의 나폴레옹(Napoleon at the Saint-Bernard Pass, 프랑스어: Le Premier Consul franchissant les Alpes au col du Grand Saint-Bernard)’은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01년부터 1805년 사이에 그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승마 초상화 5점 시리즈이다.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 또는 알프스를 건너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the Alps)라고도 불린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가 1800년 5월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통과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간 실제 횡단에 대한 매우 이상적인 시각과 이미지를 보여준다. 반면에 프랑스 예술가 폴 들라로슈가 그린 1850년 유화는 나폴레옹이 초라한 군복을 입고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통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폴레옹 사후 19년이 지난 때 제작된 것이다. 다비드 그림의 영웅적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권력을 벗어난 이미지의 반란인가?
우리 일행은 이들 영웅들의 신화가 서린 알프스 산맥을 랜트카를 타고 넘었다. 우리 시대 영웅들이 산허리를 깎아 만든 길로, 때론 바위산에 구멍을 뚫고 놓은 철길 위로... 한니발과 나폴레옹 시대에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문명의 편리함으로... 하지만 여전히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스위스 바젤 시내를 구경하고 체르마트 캠핑장을 향해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가던 중에 하행하던 캠핑카가 중앙선을 넘어와 우리 차 왼쪽 사이드 미러를 박살 낸 것이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높은 산맥의 깎아지른 좁은 산길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때다. 도착지까지 한 20분 정도 남아 마음과 몸이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할 무렵, 수백 미터 낭떠러지기를 오른쪽에 끼고 시멘트로 만든 터널구조물에 막 진입하려는 데 보이지 않던 흰색 캠핑카 한 대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갑자기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최대한 오른쪽으로 차를 붙이며 달려오는 차를 주시했다. 그 순간 캠핑카 운전수가 우리 차를 발견하고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차가 기우뚱하며 방향이 바뀌면서 “빠아악”하는 큰 소리가 났다. 그 차의 백미러가 우리 차 백미러에 부딪친 것이다.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은 죽음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에 운전대를 꽉 쥐고 앞으로 잽싸게 달렸다. 동시에 캠핑카는 멈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일행은 다들 사색이 되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살펴보니 다행히 백미러만 박살이 난 상태였다. 유럽여행 중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사라진 캠핑카를 원망할 새도 없이 십년감수했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알프스는 여전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임이 분명했다.
영웅의 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알프스를 넘은 우리는 임시방편으로 대충 수리한 백미러를 달고 거침없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밀라노를 지나 탐욕의 4차 십자군 전쟁을 부추긴 베네치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