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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17)-헝가리 다뉴브 강의 잔물결

누구에게는 경쾌한 왈츠이고 누구에게는 죽음의 찬미가 되다

by 생각전사

낮보다 밤이 좋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 오래된 아파트에 짐을 풀고 야경을 보기 위해 도보로 거리에 나섰다. 거리는 밤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다뉴브 강을 건너 강변을 따라 크게 한 바퀴 도는 길을 택했다. 대략 7Km. 스마트폰 구글 지도 앱 덕분에 길 찾기가 수월했다. 천천히 2시간쯤 소요됐다.


사월 다뉴브 강의 밤공기는 차지도 덥지도 않아 걷기에 딱 좋았다. 여황제 이름을 딴 에르제베트 다리를 지나 국회의사당을 건너다볼 수 있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거리의 조명은 아르곤을 썼는지 주황빛이 돌아 푸른빛을 띠는 수은등보다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강에는 군데군데 유람선들이 화려한 조명을 뽐내며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강가의 조명과 유람선의 불빛을 받은 다뉴브 강물은 스치는 바람 때문인지 유람선 스크루 때문인지 잔물결이 일며 반짝반짝 빛을 반사했다.


부다페스트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은 다뉴브(Danube, 영어식) 또는 도나우(Donau, 독일식) 강으로 불린다. 길이 2,860km로써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다뉴브 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 강과 브리가흐 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여기 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남쪽으로 흘러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 철문(鐵門, Iron Gates)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을 통과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 흑해로 유입된다.


강을 보니 ‘다뉴브 강의 잔물결’ 노래가 떠올랐다. 원곡은 루마니아 왕국 초대 군악대 총감독을 지낸 이오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가 1880년 군악대를 위해 만든 경쾌한 4분의 3박자 왈츠곡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우리나라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死의 讚美)’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녀의 가사는 암울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사의 찬미(死의 讚美)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를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은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알겠느냐

세상의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1926년 윤심덕은 일본의 신생 닛토 레코드사로부터 500원(지금의 5천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 곡을 녹음하고, 그 해 8월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유부남 극작가 김우진(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오는 관부 연락선에 승선했다가 현해탄에서 바다로 동반 투신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둘다 서른 살 젋은 나이였다, 윤심덕의 자살 소식에 이어 발매된 이 노래는 윤심덕과 김우진의 불륜사랑 서사가 더해지면서 불티나게 팔려 레코드판 3만~5만 장의 판매기록을 남겼다. 그 후 둘의 죽음은 끊임없이 회자됐다. 자살이 아닌 타살, 도피 등의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윤심덕의 평소 문장력으로 보아 가사를 직접 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일제는 조선에서 행한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식민지 전략을 바꾼다. 1920년 초반까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강력한 무장 독립투쟁도 일제에 의해 많이 약화된다. 그래서 의열단의 의사와 열사들이 요인을 암살하고 시설을 파괴하는 의거가 항일투쟁의 대세를 이루게 된다. 1926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보면 1월 6일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로 이전하고,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고 국장일인 6월 10일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만해 한용운이 5월 20일 ‘님의 침묵’을 발표하고 나운규는 10월 1일 영화 ‘아리랑’을 단성사에서 상영한다. 12월 28일에는 나석주 열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경찰과 교전하다 자결한다. 그 해에도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밟아도 뿌리 뻗는 보리 싹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자라고 또 자랐다.


이러한 때 잘 나가는 미모의 신여성 성악가의 불륜과 죽음, 그녀가 남긴 것으로 기록된 ‘사의 찬미’ 가사는 조선인의 좌절을 부추기기에 최고의 문화예술콘텐츠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윤심덕 노래로 엄청난 부를 쌓은 신생 닛토 레코드사가 문화정치에 골몰하던 일제의 독점 국영기업이었고, 1925년부터 1927년까지 2년간 활동하고 폐업했다는 걸 보면 윤심덕의 죽음 뒤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엄청난 음모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쾌한 왈츠가 죽음의 찬양으로 바뀐 동양의 어느 나라 사연을 아는지 다뉴브 강의 잔물결은 멋진 야경을 뽐내는 국회의사당 포토 존쯤에서 꽤 격렬해지는 듯했다. 강을 다시 건너 시내 쪽으로 가는 세체니 다리로 접어들려는 데 강변 쪽과 달리 어두컴컴한 공원 쪽에 젊은이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경계심을 발동하며 일행을 이끌고 다리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다리 중간중간에 강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니 여행의 피로가 사라졌다.


피로를 제대로 날려버린 플레이스는 이튿날 방문한 세체니 온천(Széchenyi gyógyfürdő). 부다페스트 14구에 위치해 있고, 1913년에 바로크 리바이벌 건축으로 건립되어 유적지 같은 고풍과 우아함을 자랑한다. 주차장은 온천장 주위에 꽤 있는 편인데 워낙 차가 많아서 한참 뺑뺑이를 돌다가 겨우 차를 주차할 수 있었다. 온천수는 74°C와 77°C의 2개의 샘에서 공급되며 황산염, 칼슘, 마그네슘, 중탄산염, 불소 등이 포함되어 척추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대형 수건을 빌려 안으로 들어가니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은 그다지 뜨겁지 않고 따뜻한 편이었다. 하지만 야외 온천이라 물 밖으로 나오면 쌀쌀해서 수건을 몸에 둘러야만 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한 동안 시간을 보내니 몸 컨디션이 한결 좋아지는 듯했다.


부다페스트에도 성당과 어부의 요새 등 볼 것이 많았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볼 거리보다는 편안히 쉬고 맛있는 거 먹는 게 더 좋아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는 무리하지 않았다. 야경을 본다고 2시간을 걸으며 이미 체력을 소모했으니 천천히 구경삼아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체코로 가는 길에 1박을 오스트리아에서 할 것인가, 슬로바키아에서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다가 슬로바키아 노선이 좀 더 수월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오스트리아는 다음 여행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래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는 체코로 가는 여정의 도시가 되었다. (계속)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래된 아파트
헝가리 부다페스트 에르제베트 다리
다뉴브 강변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체니 다리에서 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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