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헌신인가, 화합과 공존 상징인가? 아니면…
슬로바키아 공화국(Slovenská republika)은 중앙유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체코, 북쪽으로 폴란드, 동쪽에 우크라이나, 남쪽에 헝가리, 남서쪽에 오스트리아와 접해 있다. 헝가리 상류의 다뉴브 강이 시내를 관통하지만 바다를 끼지 않은 내륙 국가이다. 수도는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어가 공용어이다. 민족은 서슬라브족인 슬로바키아인이 다수이고, 체코인이 두 번째다. 한 때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로 통합되었고 2차 대전 때는 나치 독일의 치하에 들어갔다. 나치 독일과 대항했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다.
구 공산권 시절,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둡체크(1921~1991)는 1968년 1월 5일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다. 그는 경제와 정치면에서 부분적인 분권화를 실시하여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 보도, 표현, 이동의 자유 제한을 폐지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8월 21일 소련군과 바르샤바 회원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해외로 망명했던 둡체크는 1989년 체코에서 시작된 비폭력 시위인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연방 의회의장으로 복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둡체크의 정책은 훗날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1931~2022)에게 영감을 주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영향을 끼쳤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는 역사변혁의 원동력이 됐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도로 바닥에 “Mr. Gorbachev open this gate!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열어주세요! ...이 벽을 허무세요.)”라고 적혀있는 동판이 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1911~2004)이 1987년 6월 12일, 동판이 설치된 바로 위에서 고르바초프에게 한 말이다. 그 후 2년 반이 지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고, 그 구멍을 통해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쏟아져 나오는 것을 전 세계인이 목격했다. 그때 동독에서 양자화학연구원으로 일하며 장벽 근처 작은 아파트에 살던 메르켈은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되어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16년간 독일 게르만 민족을 이끌었다.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인은 과거보다 점점 더 밀접하게 생각과 행동이 서로에 영향을 미치며 얽히고설키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일행이 간 곳은 브라티슬라바 시내를 내려다보며 다뉴브 강 건너 언덕에 서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그리 크지 않은 성, 바로 브라티슬라바 성이다. 성 주위에 주차를 하고 비탈진 길을 오르다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글씨를 알 수 없어 이슈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시위는 아주 차분했고 경찰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곳은 의회의사당 건물 앞이었다.
성은 9세기부터 18세기까지 대 모라비아 왕국,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건설되었다. 고딕 건축,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건축이 혼합된 양식을 띠고 있다. 1809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181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체코슬로바키아 시대였던 1956년에서 1964년까지 복원되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브라티슬라바 거처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었고, 지금은 슬로바키아 의회와 국립박물관이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에는 유럽의 어느 광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말 탄 영웅 상과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물이 있다.
광장의 영웅은 대 모라비아(Great Moravia) 왕국의 스바토플루크 대왕(Svatopluk I of Moravia, 846~894). 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인물이다. 모라비이 왕국은 한때 독일의 일부, 체코와 슬로바키아 전역, 폴란드와 크로아티아 일부까지 세력을 떨쳤다. 이 민족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 입구의 개선문 꼭대기와 또 다른 기념물 위에는 허리춤에 칼을 차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그런데 얼굴과 몸이 없다. 언뜻 봐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다가 자세히 보면서 알게 되었다.
왜일까? 아무리 뒤져도 정보가 없다. 뇌피셜(나만의 생각)을 작동해야 하나 하다가 주 슬로바키아 한국대사관에 이유를 묻는 메일을 보냈다. 아직 답은 없다. 내 뇌피셜로 상상하고 추론한 의미는 이렇다.
첫째 ‘무명의 용사’ 일 가능성이다. 슬로바키아는 우리나라 절반 크기의 인구 550만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작은 나라이다. 강성한 주변국가의 부상과 패망에 따라 많은 침략을 받았다. 이때 나라를 지키다 숨진 수많은 용사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비록 얼굴과 몸은 부스러져 혼백이 되었지만 그 혼백조차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상징이자 무명의 헌신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닐까? 조형물 전체가 회색빛인데 비해 창끝만큼은 여전히 황금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어서 상상해 본 것이다.
둘째 ‘화합과 공존’의 상징 가능성이다.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과정을 보면 비폭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1989년 11월 17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학생 시위를 경찰이 억압하였다. 이를 계기로 11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군중 시위가 이어진다. 11월 20일에 프라하에 운집한 평화 시위자의 수는 전날 20만여 명에서 50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전 시민이 참여하는 2시간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1월 28일 당의 권력을 포기하고 일당제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2월 초에는 오스트리아, 서독과의 국경 철조망과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1948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공산당이 아닌 정부를 지명하고 사임하였다. 둡체크가 1989년 12월 28일에 연방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다음날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직에 올랐다. 1990년 6월, 1946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졌고,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이를 거죽에 곱고 짧은 털이 촘촘히 돋게 짠 비단, 벨벳(Velvet)에 비유하여 '벨벳혁명'이라고 부른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신사혁명'이라고 한다.
국가의 생존전략은 지정학적인 요소와 국력에 의해 좌우된다. 국력이 강한 큰 나라는 주변국을 병합하거나 영향권 아래 복속시켜 이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 강대국을 둔 작고 힘이 약한 나라는 저항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누구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동맹을 맺거나 중립국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합과 공존'이 국가전략의 방책이 된다. 국민도 이에 적응한다. 작은 나라는 한 때 큰 영토를 개척했던 영웅을 흠모하면서도 ‘화합과 공존’이라는 현실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브라티슬라바 성의 조형물에 얼굴이 없는 것은 여길 지배했던 세력을 특정하지 않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거기다 분단으로 반쪽이 된 대한민국. 우리는 어떻게 국가를 유지해 왔던가? 주변국의 부침에 따라 우리 선조들은 ‘화합과 공존’을 택하기도 하고, 불굴의 저항으로 싸우기도 했다. 국가의 3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 중 무엇을 빼앗기기도 하고 훼손당하기도 하였지만 경제력 세계 12위, 군사력 6위를 자랑하는 나라가 됐다.
내가 슬로바키아 성의 얼굴 없는 조형물을 보고 상상한 뇌피셜은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뇌피셜을 마무리하고 흡족해하던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주 슬로바키아 한국대사관에서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얼굴 없는 조각상은 인물의 모습이 아니라 합스부르크가의 전리품(적군 지도자의 갑옷이나 무기)을 묘사한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영웅은 졸지에 적장이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에서 보면 영웅일 테지만 말이다.
슬로바키아인들이 소리 높여 외친다. 상상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런데 건물 꼭대기에 버젓이 앉은 합스부르크가의 갑옷과 무기들이 소리친다. 나의 주인은 영웅이었다고.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180도로 바뀌기 마련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