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몇 년 전 한 TV가 ‘꽃보다 할배’라는 여행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그때 본 크로아티아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집단을 이룬 갈색 지붕과 하얀 벽체의 집들, 그 집의 배경이 되는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에 깔린 흰색의 돌과 투박하지만 튼튼하고 세련되게 쌓아 올린 높은 성벽들, 무엇보다 이것들이 서로 어울려내는 색감의 조화가 환상적이라고 느꼈다. 그 후 크로아티아는 내 머릿속에 보고 싶은 여행지 1순위가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방법은 차와 배편이 있는데 우리는 렌터카 여행이라 육로를 택했다. 배편으로는 크로아티아 서안 항구 풀라(Pula)까지 4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우리의 목적지는 풀라에서 아래로 더 내려가는 노비 비노돌스키(Novi Vinodolski) 인근 언덕에 지어진 단독빌라. 슬로베니아를 거쳐 8시간 정도 걸렸다. 슬로베니아 국경을 통과할 때 입국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전에 없던 일이다. 지금까지는 우리 외교부에서 휴대폰으로 보내주는 메시지를 통해 국경을 통과했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다. 하지만 입국절차는 아주 간소했다. 일행 모두 차에 대기한 상태로 우리 여권을 국경경찰에게 건네주고 잠시 대기하면 알아서 다 처리해 줬다. 그런데 다시 보니 우리 앞에서 입국절차를 받던 한 백인은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찰이 차에 실은 짐을 다 풀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여행을 많이 다닌 옆에 있던 동서가 우쭐대며 말한다. 한국여권이 갖는 파워라고... 절차가 간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슬로베니아를 지나 크로아티아에 들어서니 점점 산세가 험해졌다. 그렇게 큰 산을 몇 개 넘으니 드디어 아드리아 해가 펼쳐졌다. TV에서 본 그 파란 바다와 처음 보는 이국의 기묘한 바위와 돌, 그걸 깎아 만든 해안도로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되어 우리 일행을 감탄하게 했다. 역시 이곳으로 여행 오길 잘했군. 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언덕으로 접어들어 좁은 골목을 따라가니 우리가 묵을 숙소가 나왔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하얀색의 2층짜리 단독빌라, 1층을 우리가 쓰는 것이었다. 방도 크고 조그마한 정원까지 딸린 집이라 이틀을 편하게 묵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해안가로 산책을 갔다. 바다가 완만하여 물이 깊지 않았고 아주 깨끗했다. 오랜 세월에 깎인 하얗고 납작한 몽돌들이 철썩이는 바닷물을 따라 춤을 추는 듯했다. 예전의 거제도 검고 동그란 몽돌들은 바닷물에 굴러다니며 “도르르” 소리를 냈는데...
아침을 먹고 리예카(Rijeka) 남쪽에 있는 크르크(Krk) 섬으로 구경을 갔다. 해안가에 들려 바다구경을 하고 요새로 지은 성도 돌아봤다. 유럽의 여느 성처럼 돌을 이용한 방어시설로 만들어졌다.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많이 받은 탓인지 성에서의 감시와 경계선, 방어방향이 산을 뒤로하고 바다를 향해 있다. 크로아티아는 제국의 부침에 따라 그 세력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은 지역이다. 로마, 베네치아가 이곳을 점령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배했다. 1910년 초 남슬라브 국가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등이 연합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 소련 공산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 사이에 심각한 인종청소의 학살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르티잔 저항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티토에 의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티토는 소련 스탈린과 거리를 두고 서방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비동맹 외교를 추구하며 국가계획경제 대신 노동자 자주관리제도를 도입하여 한 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로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노동자 자주관리제도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면서 활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지도자 티토가 1981년 사망하면서 유고연방의 균열이 본격화되었다. 1990년 소련이 붕괴되자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연방을 탈퇴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1999년까지 발칸반도에서 연방유지를 명분으로 내걸고 대 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르비아 밀로세비치의 민족주의가 추악한 인종 학살을 불러일으켰다. 이웃이 적이 되고 친구가 적이 되는 끔찍한 유고내전. 그 한가운데 보스니아가 있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대결했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풍경은 한 없이 아름답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이런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 그렇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어찌 저 맑고 푸른 바다만 보고 다 알 수 있겠는가?
슬픈 역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성을 개조해 만든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겼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명이 약간 어두운 듯한테 두꺼운 나무로 만든 식탁과 비품들이 무게감을 주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와인을 부르는 비주얼이다. 주문을 받으러 온 건장한 웨이터가 아주 잘 생겼다. 여기 풍광을 닮았다. 그에게 게 요리와 각종 해산물을 시켰다. 여행은 좋은 곳 보는 것도 좋지만 맛있는 것 먹는 것도 좋지 않은가. 우리는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식사를 했다. 다만 운전 때문에 술은 저녁으로 미뤘다.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쇼핑을 하고 항구에 있는 작은 수산물 시장에 들렀다. 아직 유로 대신 크로아티아 화폐 쿠나를 사용해서 환전을 해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한참 손짓발짓을 해서야 환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시장을 둘러보는데 아주 큰 문어와 갑오징어를 파는 노인이 우릴 붙잡았다.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 나가 잡아 온 것이란다. 문어 모양이 우리나라 문어와 조금 달랐지만 아주 싱싱해 보였다. 그 문어와 갑오징어 몇 마리를 사서 그날 저녁 맥주와 함께 푸짐히 먹었다. 양이 많아 그다음 날에도 먹을 정도였다. 맛도 좋고 두껍게 잘랐는데도 질기지 않아 부드럽게 넘어갔다. 신선한 아드리아 해가 느껴졌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수도이다. 헝가리로 가는 도중이라 들러서 성당도 보고, 재래식 시장도 둘러봤다. 기념품 가게는 보석, 시계, 장신구 등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아내가 손녀딸 준다고 작은 예쁜 천사 인형 두 개를 샀다. 유고내전 당시 이곳 자그레브에서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었는데... 사람들은 안식과 평화를 원하면서도 싸우고 싸우면서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일을 반복한다. 인간의 본성이자 한계가 아닐까?
크로아티아. 풍광이 아름다운 나라. 그걸 누구는 욕심을 내어 차지하려 했고, 누군 지키려 했다. 슬픈 역사를 품은 시리도록 빛나는 푸른 아드리아 해를 뒤로 하고 우리는 헝가리로 향했다. 그때 나는 잔상에 남은 아드리아 해 푸른 바다를 떠올리며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꼭 보고 싶었던 도시 두브로브니크(Dubrovnik)를 일정상 못 봤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