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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널 버릴 뻔했어

중고 자전거의 회생

by 생각전사

수년 전 둘째 아들이 S대학원에 다닐 때 석사 논문을 쓴다고 산 자전거. 둘째가 학위를 마치고 직장에 취직을 하면서 탈 일이 거의 없다며 구석에서 녹이 슬고 있던 이 놈을 내게 주었다. 3년 반 전이다. 공직에서 물러난 나의 일상이 전에 없이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타이밍이다.


한 동안 한가롭던 이 놈은 때 빼고 광내고 오산, 평택, 기흥, 분당, 서울 등 사방으로 부리나케 싸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코 타이어가 펑크가 나고야 말았다. 이 놈에게 1차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때 나는 이참에 이 놈을 발로 걷어차고 비싼 새 자전거로 바꿀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새 자전거를 알아보니 2000만 원, 1000만 원, 600만 원, 2~300만 원, 100만 원... 가격도 천차만별 종류도 부지기수다. 대략 2~300만 원대로 구매를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타이어를 좋은 걸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놈이 1차 위기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인터넷에서 독일제 타이어를 주문하여 유튜브를 보고 손수 바꾸어 달았다. 역시 타이어를 좋은 걸로 바꾸니 승차감이 기가 막히게 좋아졌다. 방지턱을 넘을 때 덜컹거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실 이 놈은 Made in china 얼굴을 달고 있지만 구동계는 일본산이다. 1차 위기 때 타이어를 독일산으로 바꾸어 장착했으니 바디는 중국산, 구동계는 일본산, 타이어는 독일산인 제법 글로벌한 놈이 된 것이다.


며칠 전 청계산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이 놈을 타고 왔다. 30Km 정도 내리막 길과 평지를 달린 후 신갈고개를 넘어오는데 기어 변속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 후 집까지 10여 Km를 기어 변속 없이 오르막 길에서는 내려서 이 놈을 끌고 평지를 만나면 다시 이 놈을 타고 오는 힘겨운 길이 되고 말았다. 이 놈에게 2차 위기가 온 것이다. 1차 때 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다시 나의 새 자전거 인터넷 쇼핑몰 서핑이 시작됐다. 600만 원짜리가 300만 원에 할인되는 제품이 눈에 띄었다. 가벼운 탄소제품이라니 알루미늄 몸뚱이인 이 놈보다 낫지 않을까? 신이 난 내가 "좋아. 너로 정하겠어."라고 하는 순간, "수리점에 가봐서 수리비가 턱없이 비싸면 그때 바꾸자."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나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 놈을 타고 집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자전거 수리점에 갔다. 가끔 이용하던 곳인데 주인 양반이 낯설다. 1년 반 전에 수리점을 인수했다고 한다. 인상이 아주 선하고 성실해 보였다. "사장님, 이게 변속이 안되네요. 수리가 될까요?"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다. 단박에 알아본다. "이 케이블을 갈아야겠어요. 많이 낧았네요.". "얼마지요?" "1만 5천 원 주세요." "아, 그래요. 갈아주세요." 수리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세등등해진 이 놈은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1단에서부터 6단까지를 자유자재로 변속하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이 놈은 아주 싼 값으로 2차 위기를 가뿐히 넘겼고, 나의 300만 원짜리 새 자전거 꿈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오늘 나는 지난 내 의중을 눈치채면 꽤나 섭섭해할 이 놈을 달랠 요량으로 이 놈의 체인에 붙어있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고 신선한 오일을 듬뿍 발라 주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하마터면 널 버릴 뻔했어." "미안해. 사과할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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