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축적
텍스트 Text는 약속된 기호라 그 의미를 익혀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지 Image는 보는 즉시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사진은 사실 그대로를 담고 있어 더욱 그렇다.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되던 때 갑자기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유일하게 남은 빛바랜 1장의 사진 속 아버지만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사진 속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여겨왔다. 그 이상의 감흥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빛바랜 사진이 품은 새로운 의미를 깨우쳤다. 그것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밝은 방>을 읽고 나서다. 그가 준 영감 Insight이라 할 수 있다.
사진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사진 속의 인물과 사물은 보이지만 정작 사진을 찍고 사진을 만든 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지만 부존재로 처리되었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또한, 사진 속 인물과 사물, 배경도 오랜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로서 현존하지만 실재로는 부존재 한다. 한 때의 실재가 유령이 되어 존재하는 격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사변에 불과하다.
나의 감동은 따로 있다. 나의 감동은 빛과 시간에서 비롯된다. 70여 년 전 어느 날, 나의 아버지는 그때의 빛을 받으며 아버지의 얼굴과 몸에 비추인 그 빛을 반사하여 사진 속 형상으로 맺히셨다. 아버지 몸에서 튕겨 나온 수많은 빛 알갱이들은 한데 축적되었고, 오늘의 빛 아래서 단절 없이 빛나고 있다. 나는 사진 속에서 부존재의 존재인 유령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축적된 빛과 축적된 시간을 만나는 것이다.
빛바랜 아버지 사진을 다시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의 얼굴과 나의 아들의 얼굴과 나의 손녀의 얼굴이 지금의 빛을 받아 반사하여 내는 형상과 겹쳐 보인다. DNA의 연속성이요, 긴 시간의 축적이다.
나는 오늘도 빛바랜 1장의 사진에서 1940년대 일제의 수탈로 지주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잃고 강원도 산골마을 금광으로 흘러들어와 어느 날 빛이 되신 죽지 않고 살아있는 불멸의 아버지를 만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