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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ug 14. 2024

16. 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

Poem




가마니에 덮인 당신을 훔쳐본 날부터였어요

심장에 실타래 감듯 그리움을 돌돌 말아 놓았지요     


똬리를 틀어 머리를 세우고 있을 때

징그러워, 사람들이 뒷걸음치면

싱그러워, 나는 당신을 어루만졌어요     


스삭스삭, 짚신 삼는 소리가 달빛을 썰면

당신이 내게 오는 소리 같아 자꾸 내다보았어요     


나의 구렁이여, 신랑이여

당신이 벗어놓은 허물이 불에 타고 연기가 우리를 긴 이별에 가두었어요 

허물을 본 죄가 내 허물을 키워 재를 뒤집어쓴 채 이렇게 울어요     


당신, 이제 부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칠년 묵은 간장독에 머리를 감고 칠년 묵은 된장독에 들어갈게요

그러면 당신이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구렁이가 될 수 있을까요

구렁이가 된 나를 당신은 사랑할 수 있을까요     


땅을 기어서 당신 소식 들리는 세상 끝 마을에 도착하면

낮은 매화나무 위에서 가지를 감고 기다릴게요     


구렁이 몸으로 우리 다시 만나요     


우리를 갈라놓았던 새벽이 없는 곳으로 가서

서로를 칭칭 감아 사랑을 나누고 꼬물꼬물한 자식을 열 낳아요      


아침에는 이슬을 핥고 밤에는 먹이를 잡아 나누고

고갯짓만으로 마음을 헤아려요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 그런 미물로 함께 살아요






*강나무,「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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