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교실 창밖은 타들어갈 듯 해가 내리쬐고 적정 온도를 유지하느라 냉방기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이 여름, 나는 슬기로운 어린이집 생활을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
무더위를 잊게 도와주는 것은 뭐니 해도 재미있는 옛날얘기다.
구연동화는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과 기, 승, 전, 결마다 달라지는 표정과 입모양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어릴 때 외할머니는 옛날얘기 해달라고 졸라대는 나에게 옛날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내 요청을 매번 거절하곤 했다. 핑계치고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옛날옛날 오랜 옛날로 시작하는 얘기는 왜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 걸까?
거절을 위한 뭔가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해서 그런 말을 지어냈을까?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말이 있고 할머니의 그 논리도 옛말이니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일단 옛날옛날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작금의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크다.
착하고 정직한 사람은 고생고생 하다가 나중에 큰 복을 받고 못된 사람은 벌을 받는 이야기 전개가 현실과는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거짓말도 잘해야 하고 적당히 사람들 뒤통수도 치고 허세도 좀 부리다가 주도면밀하게 내 몫을 챙겨야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전래동화의 주인공처럼 살기에는 세상은 뿌린 대로 거두기가 쉽지 않다.
태어나면서 흙수저, 금수저로 갈리는 서열을 노력과 성실로 바꾸기에는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난 우리 연장반 아이들이 가난하게 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정확한 데이터나 논문자료 하나 없이 옛날얘기가 쓰고 있는 그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차원에서 약간의 각색을 시작했다. 어차피 옛이야기는 종이책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구전동화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은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이야기의 끝 장면이다.
‘잘 먹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라는 말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일단 아이들에게 “그래서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질문을 던져 결론을 아이들 각자의 행복지수에 맡긴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거다.
맨날 놀이공원 가는 거나 내가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를 하루에 한 봉지씩 먹는 것 일 수 있다.
마트 과자코너에서 쇼핑카트에 맘껏 먹고 싶은 걸 담는 게 최고의 행복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엄마 침대에서 엄마 냄새를 맡으며 잠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아이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적극적으로 각색을 하는 부분은 결혼이다. 이 주제를 아이들에게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착한 여자 주인공은 결국 훈남 왕자나 부잣집 도련님을 만나서 결혼한다. 그런데 그 착한 여자 주인공도 언제나 예쁘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하는 결혼이 인생 최고의 종착역인 것처럼 말하는 그런 결론이 싫다. 그래서 난 과감히 내 머릿속의 가위를 움직여 싹둑싹둑 검열을 시작한다.
다 갖춘 남자가 예쁘고 착한 여자에게 말한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
여자가 잠깐 생각에 잠긴다(당연히 심사숙고할 문제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뗀다.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 결혼보다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여행도 하고 싶고 재미난 책도 많이 읽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지 않나요?
그러니 도련님 혹은 왕자님, 우리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많이 보낸 후에 더 멋진 사람이 돼서 다시 만나요.”
썩 괜찮은 말을 뱉고 난 여주인공은 고개를 들어 그윽한 눈으로 상대가 아닌 하늘을 한 번 바라본다.
이런 반전에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열린 결말에 박수를 보내는 일은 전혀 없다.
아이들 귀는 스펀지다. 판단 없이 재밌게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끝이다.
괜히 나 혼자 뿌듯한 거다.
또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 역시 납량특집이 제격이다.
이불 뒤집어쓴 채 눈만 내놓고 보았던 전설의 고향 구미호는 곤란해도 그에 못지않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여우 누이'는 구연동화로 들려줄만하다.
“선생님, 오늘 '여우 누이' 또 해주세요.”
그럴 줄 알았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이 졸라대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옛날 얘기는 이런 부작용?을 감내해야 하다.
어른들은 누가 했던 이야기 또 하면 언짢아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아는 얘기가 더 재미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왜 이야기 속의 여우나 다른 동물들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걸까?
이들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긴 세월을 인내하지만 우매한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동물 본연의 정체성으로 돌아가면 이건 비극적 결말이 된다.
‘구렁덩덩 새 선비’는 구렁이와 결혼한 가난한 집 셋째 딸이 주인공이다.
맘이 얼마나 고운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상대가 구렁이든 지렁이든 상관없이 ‘아모르파티’를 노래하며 시집간다. 그리고 첫날밤에 독자의 예상대로 그 구렁이는 아주 잘생긴 훈남으로 변신한다(이 부분이 좀 설렌다).
변변한 외모와 재력으로 부인의 신뢰를 얻은 구렁이 신랑은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부인이 지켜야 할 행동강령을 읊어 준다.
사람이 지은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늘 사람이 되지 못해 안달이 난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구렁이, 새, 여우, 우렁, 단군신화 속의 호랑이와 곰도 모두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거나 사람세상 속에서 사람을 흉내 내거나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한다.
난 이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이 되고 싶니?
사람은 이렇게 사람이 지구에서 제일 존엄하고 썩 잘난 줄 안다. 그 우월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개미 한 마리조차 나에게 굽신거리지 않는데...
혹시 오늘 밤, 인간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 안온한 굴속에서 엄마 너구리가 새끼 너구리들을 핥아 주며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얘들아, 사람이라는 동물들은 참 이상하단다.
밤에도 불이 안 꺼지는 게 아침부터 밤늦도록 끊임없이 먹이를 찾나 봐.
가여워서 어쩌니, 우리가 사람이 아닌 게 또 얼마나 다행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