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Aug 21. 2024

17. 한 문장

Essay



어린이집은 매주, 매월, 가정에 보내는 교육계획안과 크고 작은 행사, 각종 유행하는 전염병과 특이사항에 관한 안내문을 작성하는 게 큰 일이다.

이런 스트레스로 인한 교사들의 탈모 방지를 위해 다양한 안내문 샘플이 있다.

계절에 알맞은 그럴싸한 인사말과 더불어 문장과 문장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접속사들의 적절한 사용이 돋보이는 이 기능은 편지나 독후감을 써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작문에는 문외한이 교사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만능은 아니다. 원장이나 교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안내문을 만드는 작업이 여전히 힘들다고 토로한다.     


“너한테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이런 말을 꼭 갖다 붙인다.     


또 매일 작성하는 키즈노트는 경력이 있는 교사나 신참교사 모두에게 큰 숙제다.

예전에는 노트에 직접 수기로 작성을 해서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지금은 모바일로 정해진 폼에 글을 입력하니 부담이 그나마 좀 줄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의 똥이 물렀는지 딱딱했는지, 왜 목놓아 울었는지, 어떤 교구를 가지고 놀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는지, 적는 것도 한두 번이지…….     


글을 읽는 학부모들의 눈이 무섭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제쳐두고 문장을 통해 숨어 있는 혹은 숨겨진 내가 어떻게 드러날지 걱정이 앞선다. 부담은 마음과 몸을 경직시키고 생각까지 얼음으로 만든다. 결국 잘하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원인이다.     

글을 쓰는 게 이렇게 어마무시한 일이다.     


대학 재학 중에 유치원에서 실습을 했는데 한 교사가 키즈노트를 들고 다니며 각반에 있는 교사들에게 자신이 쓴 문장이 괜찮은지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본 적 있다.

결국, 맨 나중에 내 차례까지 왔는데 유아가 집에서 가져왔다고 우기는 곰인형이 아무리 찾아봐도 유치원에는 없다는 별것도 아닌 딱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그 한 문장에 어떤 오해나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지 않기를, 뭐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는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어 적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이 내게 부담스러운 존재라면 더더욱 피하고 싶은 일이 된다.     


일단 입에서 나온 말은 공중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말은 주고받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록에 남지 않는 말은 청문회 유행어인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라고 얼마든지 우길 수도 있고 ‘그런 말 한 적 없다’라고 거짓말도 가능하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글은 곧 단서이자 증거가 된다.      


나는 거의 매번 해가 바뀔 때마다 다이어리를 사서 일기를 좀 끄적일 결심을 한다. 하지만 오래 못 간다. 일단 솔직할 자신이 없다. 아무리 일기장에 자물통을 채워놓아도 (이런 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내 일기를 읽을 수도 있을 누군가를 고려하게 된다. 그리고 슬프거나 화난 감정을 옮길 용기도 없다. 눈앞에 불편한 내 감정의 증명서류를 만들어 놓은 거 같고 그걸 대면해서 현재를 반추하고 앞으로 나갈 힘을 얻는 그런 그릇이 못 된다. 맘에 들지 않는 필체도 동력을 떨어뜨리고 펜 자국이 얇은 종이 뒷면을 통과해서 선명히 드러나는 어제 쓴 일기도 거슬린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내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실 나도 누군가를 붙들고 매달리며 묻고 싶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 길이 남을 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고민은 나 혼자 있는 골방에서 하는 거다.  

내 사정은 뒤로 하고 글짓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주제넘지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써보세요. 서툴지만 진솔한 글은 당신의 진정성을 보여줄 테니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슬반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는데 평소에 미소가 떠나지 않던 선생님 얼굴이 사뭇 심각하다.

연우가 친구를 깨물지 않고 잘 놀았는지, 수빈이는 ‘행복한 내 얼굴’ 그림책을 오늘은 몇 번 보았는지 궁금하지만 참는다.     


‘키즈노트를 쓰고 있구나.’     


조용히 한쪽에서 내 할 일을 시작한다.     


“휴”     


간간히 한숨 소리가 퍼진다.     


“에고에고”      


신음 소리도 들린다.     


오늘도 이슬선생님은 한 문장과 씨름 중이다.               

이전 16화 16. 매화나무를 감고 기다릴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