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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04. 2024

19. 사랑이라는 말

Essay


“엄마! 사랑해, 갔다 올게, 기다려, 정말 사랑해!”     


아침 8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

창밖, 아파트 외벽에 부딪쳐 증폭되는 저 청량한 외침.     

처음에는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발코니에서 지켜보는 엄마를 향해 인사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인사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되면서 그건 엄마를 향한 인사가 아니라 마음의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고 짐작으로 그 아이는 보통의 평범한 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갔다 올게, 기다려'는 '사랑해'와 '사랑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는 햄과 달걀과 양상추와 토마토다.      

너무 궁금했다. “사랑해”로 야행성인 나를 이른 아침? 마다 깨우는 저 소리의 실체가.

그렇다고 파자마 차림으로 뛰어나갈 수도 없고.

어느 날 슈퍼에서 장을 보는데 반갑게도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났다.

덩치가 제법 큰 초등학생 여자아이였고 흰 원피스를 단정히 입고 머리도 양 갈래로 예쁘게 묶은 채 과자를 고르고 있었다. 아침의 목소리처럼 큰 소리로 엄마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라기보다 아침마다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혼잣말에 가깝겠다.     


병설 유치원에서 기간제 특수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자폐성 장애가 있던 서우의 하루는 하트로 시작해서 하트로 끝났다.

하트를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스티커를 담아놓은 바구니에서 하트모양만 골라서 그걸 몸에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오랫동안 놀았다. 어디서든 하트나 그 비슷한 모양만 보아도 활짝 웃으며 펄쩍 뛰었다. 서우가 유일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따라 하는 동작도 역시나 하트였다.

서우에게 하트는 무엇이었을까.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똑 떨어지게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든 그 사랑이라는 걸 서우는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었을까.     


사랑은 본능인가?     


아이들이 종이접기를 한다.

서점 스테디셀러 코너에 있는 책처럼 새, 배, 비행기, 상자 등을 제치고 하트는 종이 접기의 입문이자 해를 거듭해도 질리지 않는 ‘사랑’이다. 콧물과 손때가 묻은, 방금 접었는데도 벌써 해진 하트가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질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 어린 탄성이 절로 나온다. 대체 사랑이 뭐라고. 손과 눈의 협응력과 인지능력, 섬세함을 입증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꾸자꾸 맥없이 좋은 거다, 사랑이.      


사랑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통곡을 하게도 만든다.

아침 햇볕에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거미줄처럼 경이롭다.

그러나 바람에 찢기고 나면 한없이 처참하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세상은 사랑으로 꽉 차 있다.

오늘 지구에서는 과연 몇 명이 사랑을 고백했을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유지태의 명대사는 곧 사랑이 변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모호한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 안 해’ 그 한마디로 끝이라니, 실망이다.

그 말은 들은 사람은 눈물을 흘리거나 악다구니를 쓰거나 절망한다.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 우리는 모른다.

사람에 따라 사랑은 돈이고 관심이고 칭찬이고 평온이고 안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어떤 쓸모의 상실이다.      


“자꾸 물구나무가 서고 싶어져”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데 시원하게 긁을 수가 없어”     


“생각난 듯 손을 뻗으면 애착인형처럼 네가 만져지면 좋겠어”     


“너와 같은 가방을 메고 있던 사람의 등을 한참 바라봤어”     


“흔한 노래가 이제 흔하게 들리지 않아”     


‘사랑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신할 수 있는 말들을 이렇게 상상해 본다.

그럼 ‘사랑이 식었다’라는 말은 ‘물구나무서는 게 자신이 없어’ 혹은 ‘몸이 이제 더는 안 간지러워’ 같은 말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정신 차려보니 별거 아니었던 그 마음을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가벼워 보이고 민망해서 대신 ‘사랑’이라는 말을 빌려와 쓰는 것 같다.     

대체 그 ‘사랑’이 뭐길래 우리는 평생 듣기를 소원하고, 못해서 안달이고, 그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걸까?     

만약 나라면 그런 감정을 두루뭉술한 사랑이라는 말 대신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초원에 게르를 짓고 그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언 손을 녹여가며 터진 옷을 기우는 여자가 화면에 보인다. 손톱이 까맣다. 찬바람에 익숙한 볼이 붉고 내내 수줍다.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난로에 나무토막을 넣는 남편을 쳐다보고 조용히 입을 뗀다.     


“ 다른 소원 없어요.”     


내가 들은 말 중 최고다.

드넓은 초원에 밤이 찾아오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 박힌 별들이 한꺼번에 빛을 뿜는 순간이다.

얼마나 명료하고 구체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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