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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레리나 Aug 28. 2022

내 일기장 지분의 반은 아빠다

빵쥬의 세포들

어린 시절 일기장을 보면 빵 터지는 경우가 많다.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써놓기도 했고, 일기의 주제도 대단한 것이 없다.


친구와 씽씽카(지금의 킥보드)를 탔다는 내용

미술학원에서 벽지로 지갑을 만들었다는 내용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선생님이 ‘타코 Taco’라는 미국 음식을 만들어주셔서 난생처음 먹어봤다는 내용 (심지어 타코는 멕시코 음식이다.)


이런 나의 일기장에는 역시 아빠 이야기가 정말 많다.

그만큼 저녁이 되어 하루를 돌아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아빠와 함께 한 무언가였고,

심지어 아빠가 야근으로 늦게 들어오셔서 얼굴도 보지 못한 날조차 내가 얼마나 간절히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드는지가 쓰여있다.





아빠의 출장


내가 어릴 때 아빠는 출장을 정말 많이 다니셨다.

국내 지방 출장은 물론이고 해외 출장도 많이 다니셨는데,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되어 홍콩을 경유해야만 갈 수 있을 때부터 중국과 태국 출장이 잦으셨다.


한 번 출장을 가면 꼬박 몇 달을 보내고 오셨는데, 아빠 바라기인 나에게는 참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영상통화를 할 수도 없었고, 그나마 음성 통화조차도 쉽지 않았다.

밤에 울리는 집전화 벨소리에 "아빠다!" 하고 뛰어가 받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린시절 일기장


제목: 아빠가 출장 가신 날

아빠는 오늘도 전에같이 또 출장을 가신다.
오늘도 전에 아빠가 갔던 태국으로 말이다.
나는 아빠가 출장을 갔다가 오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지실 몸이다.
나는 아빠가 출장을 가시는 것이 아주 싫다.
아빠도 못보고 아빠는 심들어하시고 참 싫다.


아빠가 출장 가시는 게 너무나도 싫은 1학년 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있는 일기다. 어린 나의 표현력도 흥미롭다.

나는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지실 몸이라는데' 아마 아빠가 출장 가시는 게 너무 싫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드러눕고 싶다는 표현인 것 같다.

그리고 어린 내 눈에도 아빠의 출장이 고단하고 힘들어 보였는지, 그냥 힘든 것도 아닌 '심들어 하신다'고 쓰여있다.



드디어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 일기장


제목: 아빠가 오신 날

오늘은 아빠가 오시는 크리스마스이브 24일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길에다 얼음까지 꽁꽁 얼어서 참 추웠다.
얼음이 땅과 차길에도 깔려서 차가 슬슬 기어 다녀서 버스가 늦게 왔다.
그래도 공항에 도착했다.
아빠를 만났는데 아빠 옆에 넷째큰아빠와 큰엄마가 계셨다.
아빠가 공항에서 큰 강아지를 사놓으셨다.
강아지 목에 어떤 영어가 써있었다.
나는 영어를 몰라서 아빠에게 물었더니 폰고라고 했다.
나는 강아지 이름을 폰고라고 지었다.
강아지가 참 예쁘고 귀여웠다.


몇 달만에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아빠를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갔던 이 날이 똑똑히 기억난다.

눈이 많이 내린 빙판길이었기에 우리를 데려가 줄 공항행 버스는 늦게 도착했고,

얼른 달려가 아빠를 만나고 싶은 내 마음과는 반대로 버스는 쌩쌩 달리지 못했다. 차가 슬슬 기어 다녔다고 쓴 걸 보면 어린 내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는지 알 것 같다.


공항에 갔을 때 아빠가 커다란 달마시안 인형을 안고 계셨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 나이 때 즈음 ‘101마리 달마시안’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빨간 목걸이 명찰을 달고 있던 아빠 강아지가 퐁고였다. 아빠가 안 계시는 동안 나와 함께 할 아빠 강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출처: Diseny.com


아빠는 출장 다녀오실 땐 꼭 선물을 사 오셨다. 시장에서 그 나라의 전통적인 물건을 사 오기도 하고, 주로 경유하는 홍콩 공항의 면세점에서 사 오셨다.

엄마의 선물은 주로 빨간 루비 목걸이, 녹색 알이 박힌 반지와 같은 보석류였고, 오빠 선물은 주로 게임기나 장난감, 그리고 내 선물은 디즈니 공주님 손목시계, 각종 인형들, 헤어핀 그리고 치파오(중국 전통 의상)까지 다양했다.






꽁냥꽁냥 일상들




제목:크리스마스 선물

둘째큰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방에서 책을 고르라고 하셨다.
나는 책 대신 얼굴 칠하기를 골랐다.
얼굴칠하기로 아빠가 내 얼굴에 별똥별을 그려 주었다.
나는 아빠 얼굴에 앵두를 그려 주었다.


딱 네 문장이 전부인 한 바닥 짜리 일기에도 십여 년 전 아빠와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마치 이 세상에 아빠랑 나, 단 둘만 있는 듯한 느낌.


어릴 때 천둥번개가 치면 아빠는 박쥐처럼 이불을 양손에 쥐고 두 팔을 힘껏 벌렸다. 그럼 나는 뛰어가서 아빠 품에 안긴 채 커다란 이불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쿠구쿵-!

천둥이 칠 때 아빠는 알 수 없는 큰 소리('아으아아아!')를 내며 이불로 나를 삼켰다. 아빠와 함께 이불에 쏙 품어지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둘이 꺄르르 웃었다.

돌이켜보면 천둥소리보다 아빠 소리가 훨씬 크고 소란스러웠다.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아빠의 큰 소리에 나는 더 자지러지며 아빠품에 안기곤 했다.






별 것 아닌 일상들





제목: 아빠가 늦게 오신 날
아빠가 전화로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빠 드릴 군고구마를 남겨 놨으니 됄수 있도록 빨리 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아빠를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아빠는 12시 10분쯤에 오셨다.


제목: 아빠가 회사를 않간날
어제 아빠가 새벽 1시에 들어 오셨다.
우리들은 12시까지 기다리다 그냥 잣다.
오늘 아침에 아빠가 있었다.
어제 술을 많이 잡수셔서 조금늦게 가는데 아빠는 조금있다 간다고 계속 하면서 아이에 회사를 않갔다.


아빠를 드리려고 군고구마를 남겨두었는데, 아빠의 퇴근이 혹은 술자리가 늦어져서 아쉬워했던 하루.

그리고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던 시절, 전날 술을 많이 드셨던 아빠가 '간다 간다' 하면서 결국 회사를 안 가셨던 하루.

지금은 사장님이 되신 아빠, 십여 년 전 이 일기를 보시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일기 쓰기가 방학숙제 1번이었던 때,

의무적으로 일기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았지만 지금 보니 정말 소중하다 못해 귀하다.

맞춤법도 맞지 않는 단 몇 문장으로 표현한 별거 없는 하루하루이지만, 이 하루하루가 모여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감정들이 내 세포 하나하나가 되어 나를 이루었겠지? ‘유미의 세포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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