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하고 있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 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2년 전, 이맘 때쯤 난 한 언론사에서 청소년 마약 실태와 관련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마약 청정국은 깨졌다고, 매년 마약 청소년이 늘어가고 있다고 우린 보도했다. 우리 취재 팀은 마약과 관련된 전문가 10명을 만났다.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살인이나 강도처럼, 마약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데 왜 범죄인가’.
한 번쯤 생각해본 적 있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질문의 저변에 마약에 대한 권유나 시도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봄직한 질문을 대신 던져주는 질문자의 역할이니까 던졌을 뿐. 그럴 때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마약 중독자라는 사람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그가 끼치는 피해, 그리고 그것이 국가적 손실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라고. 그렇다면 과연 마약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냐고.
다시금 밝히지만, 난 마약이 범죄라고 생각한다. 마약에 손 대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명백백하게 밝혀둔다. 세상엔 선험적으로 범죄이며 비윤리적이지만,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범죄들이 있지 않은가. 마약이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선험적이고 정언명령으로 규정된 범죄. 하지만, 언론이 접촉한 최고의 마약 전문가들도 마약이 타인을 해친다는 논리에 대한 나의 의문을 해소해주진 못했다.
그 논리적 허점을 꼬집은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프랑스 소설가로 그는 코카인 중독에 대한 변론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코카인을 하든 말든 자신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를 변용해 김영하는 1996년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출간했다.
책은 자살 조력자에 관한 내용이다.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의 마지막을 돕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사람들의 일생 이야기. 그리고, 서문에 배치한 문장들은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 중 일부를 발췌한 것. 나는 처음 책을 읽고 나서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막연한 무서움이 떠올랐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가 와서 내게 말을 건다면, 나는 손을 잡고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파괴하고자 할 마음이 정말 한치도 없는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마약 전문가들이 말한 것처럼, 사람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마약이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그 둘은 모두 내 인간관계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나를 파괴한 여파는 나에게서 그치지 않고 그 파장은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다가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고 마약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상식적으로 이길 수 없는 이야기다.
최근의 내 얘기를 곁들여보자면, 난 얕고 불안정한, 언제 떠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관계 속에 몸 담고 있다. 성인이 된 지 8년 됐지만 깊은 애정과 소속감과 유대감을 공유하는 사람을 여럿 만나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관성적으로 나를 파괴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쉽게 말해 잠을 많이 잔다. 회피한다. 나에게 인접한 문제들은 많다. 자격증 공부도 해야 하고,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도 써야 하고, 기업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잠으로 회피 중이다. 나를 위한 시간들을 보내는 데 자신감이 떨어졌다. 나를 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시간을 보내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잠을 잔다. 이게 나를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다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파괴에 대한 해석에 따라 권리의 해석도 달라지겠지만, 현재의 나는 나를 파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