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iore 피오레
Oct 21. 2024
맥주 캔하나를 꺼내어 캔 뚜껑을 땄다. "똑 치이익~" 유리 맥주잔에 얼음을 넣고 맥주를 따랐다.
“왔니? 저녁은? 많이 마시지 마. 맥주도 칼로리가 높아. 살찐다니까.”
“가뜩이나 나이도 많은데, 살까지 찌면 값어치 떨어져!”
“엄마! 내가 물건이야? 값어치가 뭐야, 값어치가!”
“서른 살에 무슨 항공사 취업이야. 얌전하게 있다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하는 나이에…….”
엄마가 불안한지 먼저 설레발을 친다. 수현은 어렸을 적부터 독립적이었다. 좋게 말해서 독립적인 거지, 자기 일을 결정하거나 변화를 추구할 때에는 엄마의 의견도 듣지 않고 먼저 멋대로 결정하고 난 뒤에 통보만 했다. 엄마는 수현을 보며 생각하다가 말을 뱉었다. ‘어쩌면 독단적인 자기 아빠의 모습을 꼭 닮았는지…….’
“수현아, 우리 그러지 말고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 한 번 만나 봐라.”
“엄마, 쫌! 그 얘기는 그만 좀 해! 나 살면서 엄마 의견 무시한 적 없고 존중해 줬어. 아빠가 그렇게 집을 나가신 뒤, 이제 엄마에게는 나뿐이라고 생각해서 내 의사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 얘기는 그만 해.”
엄마는 수현이 한 말에 기가 막혀서인지 그대로 서 있다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수현아, 너 엄마가 얼마나 비참하게 아빠에게 버림받았는지 알잖아. 너 지금 그 얘기 하면 안 돼.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건 수현이 너 맞선 이야기였어.”
“알아, 엄마. 그런데 나도 생각 좀 해줘.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면서 나도 느낀 게 많아.”
수현은 마음에 갈증이 느껴지는 것인지 심하게 목마름을 느꼈다. 맥주 한 캔을 또 따서 한 번에 마셔버렸다. 갈증이 해소되자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해 늘 외로워했던 엄마. 엄마가 잘해주고 매달릴수록 아빠는 엄마를 더 매몰차게 대했다. 어렸을 적에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위해서 주말 저녁이면 와인 한 잔과 안심 스테이크를 구워 놓으셨다. 아빠의 출근 와이셔츠 소맷단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색이었다. 저녁에 돌아오신 아빠의 구두는 다 쓴 콜드크림으로 윤기가 날 정도로 닦아 놓았다. 하지만 언제나 아빠는 엄마에게 따뜻한 시선 한 번 안 주셨다. 엄마는 늘 사랑을 갈구하기만 했지, 사랑받는 여자의 습성을 몰랐다.
아빠처럼 아프리카 사자 같은 사람은 한없이 순종하고 잘해주는 여자에게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어딘지 장미 가시를 숨기고 있는 여우 같은 여자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엄마는 장미 가시를 숨기고 있는 붉은 장미도 아니었다. 여우가 아닌 곰에 가까운 여자였으니, 아빠가 사는 동안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게 당연했다.
“미안해, 수현아. 좋은 모습만 보여줬어야 했는데 너에게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줬어. 하지만 모든 부부가 엄마, 아빠 같지는 않잖아. 가까운 이모네 좀 봐봐. 그런 부부도 있어. 그리고 그런 이모네가 소개해 주는 사람인데 얼마나 괜찮겠니.”
수현은 이모네 부부를 생각했다. 이모네 부부가 사이가 좋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건 이모부의 배려 덕분이다. 이모부는 기본적으로 인류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친절한 미소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타인이 싫어하는 일이 있으면 자신이 도맡아 처리하고, 사랑을 퍼주기를 잘하는 사람. 은은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성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