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베란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을 다 잡았다. 그는 한 스처럼 무너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해인이를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지리산 구례, 함양을 돌면서 의료봉사도 하고 힐링캠프도 할 생각으로 떠났던 봉사활동이었다. 지리산에는 서울에서 귀촌이나 귀농하러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분들이 많았다. 해인이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중에 한 분이셨다. 해인이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 그해에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늘 전교 1등은 해인이였다. 그런 해인이였기 때문에 의대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고 3 때 다른 수험생들처럼 치열하게 공부하던 때였다. 어느 날 아침 해인이는 몸을 일으킬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눈과 잇몸엔 염증이 생겼다. 처음엔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참고 공부하고 또 참으면서 공부했다. 원래 가늘었던 팔과 다리는 어른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들 정도로 말라갔다. 얼굴색도 핏기가 하나 없이 창백해져 갔다. 화장실에 갔다오다 쓰러진 날 해인이는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해인이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1년을 쉬고, 다시 수험생활로 복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항암 치료를 받고 조금 괜찮아진 해인은 그동안 병원치료받으면서 손을 놓았던 책들과 전쟁을 선포하듯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이 견뎌내지 못했다. 해인이 부모님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각자 박사 코스를 받고 계셨다. 부모님은 해인이를 보살필 수가 없었다. 해인은 수험생활을 정리하고 조부모님이 계신 지리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해인과의 첫 만남은 성당에서였다. 작은 시골 성당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수녀님, 저는 이번에 의료 봉사온 서희대의과 2학년 강현수라고 합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너무 반가운 소식이네요. 안 그래도 이곳은 나이 드신 분 들이 거동하기가 불편해 큰 병원까지 가기가 어려웠는데, 현수 학생 같은 의대생들이 의료봉사 와 주었으면 했어요. 이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서울에서는 어디 성당을 다니셨어요?” “네, 저는 혜화동 성당 다니고 있어요” “혜화동 성당이요? 제자 아는 언니 수녀님이 그 성당에 계셔서, 다녀온 적이 있어요, 마로니에 공원을 끼고 대학로 극장들이 있고 예전 서울대학교 근처라, 가을에 은행잎이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현수의 팔을 잡고 여기저기 안내해 주셨다.
해인이 조부모님과 함께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현수는 해인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해인은 자신과 너무 닮은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었다. 긴 팔, 다리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빛, 약간 구부정하게 앞으로 숙여 있는 어깨, 가늘고 긴 목선까지 해인은 그렇게 운명처럼 현수 앞에 서 있었다. 해인도 현수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고, 주위의 모든 소음은 사라졌다. 그저 두 사람만이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희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인 강현수입니다.” “할아버지, 지금도 농촌으로 의료 봉사하러 오나 봐요.” 해인은 현수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현수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