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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21. 2021

찔레꽃 붉게 피는~~

아이 학교 녹색 어머니날이라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다행히 아이는 줌 수업이라 준비해줄 게 없었다. 등교지도가 끝나고 잠깐 산책을 하기로 했다. 비가 그친 아침, 산책로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새소리와 가끔 뻐꾸기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걷다가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찔레꽃 향기가 진하게 머물고 있는 지점이었다. 찔레 꽃잎이 비를 맞아 잔뜩 움츠려있었다. 찔레꽃 향기만이 비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더 진하게 머무르고 있었다. 찔레꽃이 예쁘기도 하지만 그 향기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 들에 흔하게 피는 꽃에서 흔하게 맡을 수 없는 향이 난다. 나는 찔레꽃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찔레꽃을 보면 나는 어린 시절의 어느 밤이 생각난다. 내가 9살? 10살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는 내 또래 아이가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1킬로쯤 떨어진 이웃 동네에 친구 2명이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 친구들과 자주 놀았다. 그날도 해가 지도록 그 동네에서 놀았다. 그날 저녁 그 동네에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이장님이 마이크를 마을회관 앞에 내놓고 누구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있지는 않았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만 나와서 혼자 부르고 가면 되는 것이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마이크를 본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백난아 님의 찔레꽃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름 간드러지게 콧소리도 넣어서 한 곡조 뽑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술래잡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할머니와 살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할머니가 찔레꽃 노래 잘 부르더라고. 누구냐고. 그때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우리 동네였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나는 고개 숙이고 기죽은 모습일 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찔레꽃을 보면 예뻐서 한참을 보다가도 그날이 생각나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였다. 나는 그 이후에는 누구 앞에도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모임에서도 리더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맨 마지막 바로 앞,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30년이 훌쩍 넘어 다시 호기를 부리고 있다. 지금의 나의 무대는 브런치다. 동화도 소설도 아닌 나의 이야기를 쓰는 지금의 나는 그날처럼 부끄럽고, 가끔 이불 킥을 날리기도 한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브런치라는 무대에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다. 나의 지난 몇 달이 마치 그날 밤 부른 찔레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걸으면서 비에 젖은 꽃들과 꽃이 주는 향기에 흠뻑 취했다. 심장이 꽃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백난아 ‘찔레꽃’ 1절)      


산책길에 비맞은 꽃들이 지나치기 아까울만큼 청초하고 아름답다. 
활짝 피기 전 장미 한 송이가 나즈막한 향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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