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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26. 2021

엄마와 아들의 텃밭 이몽

5월 16일, 관할 교육청에서 주최한 '온가족 치유 체험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처음으로 농장을 방문했다. 아침부터 비가 왔고, 아이는 쉴 수 있는 일요일에 왜 농장체험을 굳이 해야 하냐며 입이 댓발 나왔다. 교육청관할 수백 개의 학교에서 딱 100 가족에게만 주어진 귀한 프로그램이라고 아들에게 어필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들의 툴툴거림과 함께 쓴 한마디였다.


"네~네! 딱 100 가족에게만 주는 고통이겠죠?"


속에서 우씨 하고 올라왔지만 일단 참아야 했다. 사실 아들은 체험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늦게 보내고 나는 자주 농장이나 미술관, 박물관 등등 여기저기 함께 다녔다. 밤 줍기를 하러 갔다가 손바닥에 가시 10개가 박혀서 레이저로 빼야 했다. 배농장에서는 딸 수 있는 배가 고작 2개라 시시하다고 했다. 블루베리 따러 갔을 때 덥다고 차에서 나오지도 않아서 나 혼자 블루베리를 열심히 땄더랬다. 블루베리는 맛있다며 잘도 먹던 아들. 아들은 굳이 직접 따거나 키우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다. 수렵채집에 환장하는 것은 사실 내쪽이다. 그래도 프로그램을 예약하거나 신청할 때 아이와 함께 하면 좋겠네 라고 신청하는 것이니 꼭 나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우겨본다. 나 혼자 농장체험을 가거나 텃밭을 일구지는 않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아들을 위한 것이 맞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긴장했다. 혹시 농장 분위기가 안 좋거나 재미없으면 뒷감당을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니 벌써 등골이 서늘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농장 사장님은 비때문에 텃밭체험이 어렵다고 하셨다. 대신 우리가 모종을 화분에 심으면 나중에 사장님이 각자 텃밭에 옮겨 심어준다고 하셨다. 사장님은 인심이 후하셔서 모종을 많이 주셨다. 상추, 토마토 같은 텃밭 필수 채소와 라벤더와 민트까지. 모종을 심고 있는데 사장님께서 쑥갓 모종 두 개를 더 주셨다. 아들이 앗싸를 외쳤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쑥갓이 나를 살리는구나!


모종 심기는 금방 끝났다. 사장님은 농장을 둘러보고 있으면 농장에서 기른 채소와 함께 식사를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다. 아이를 위한 텃밭체험에 부모를 위한 공짜 식사까지 정녕 온가족 치유 프로그램이었다. 농장은 깨끗하고 예뻤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산책하듯 걸었다. 농장 한편에 염소 한 마리가 있었다. 분명 염소인데 지금껏 본적 없는 젖소무늬 얼룩 염소였다. 아이는 염소에게 풀을 먹이로 주었다. 그런데 이 염소가 비 때문에 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먹고는 싶어서 고개만 내밀고 혀를 길게 빼는 모습이 웃음 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먹고 싶으면 얼른 풀만 받아먹고 집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는 계속 풀을 뜯어주었다. 



젖소, 아니 염소 옆으로 조금 더 가니 마스카라로 잔뜩 눈에 힘준 듯한 토끼 두 마리가 보였다. 토끼 두 마리에게 풀을 뜯어주었다. 한 마리는 적극적으로 잘 먹는데 한 마리는 겁이 많아서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토끼가 풀을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는 자꾸 풀을 뜯어 주었다. 우산을 썼지만 비가 많이 와서 옷이 젖었다. 가방에서 비옷을 꺼내 입혀주니 아예 토끼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노닥거렸다. 농장 화분에 딸기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딸기를 하나 따서 토끼에게 주니까 어찌나 맛나게 먹는지 신기했다.

뇸뇸뇸

토끼가 딸기 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토끼는 딸기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한 마리도 와서 딸기를 뇸뇸뇸 먹었다.


아이는 토끼와 염소에게 번갈아 먹이를 주면서 얘기도 하고 한 시간 넘게 놀았다. 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지만 아들은 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장님께서 준비해주신 페퍼민트차를 마실 때였다. 함께 체험한 다른 가족의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너 아무것도 안 한다며? 꼼짝도 안 하고 있다가 갈 거라며?' 엄마의 말에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말했다. '재미없을 줄 알았지. 염소가 있을지도 몰랐고.' 그 가족이 농장으로 올 때의 풍경이 그려지는 듯했다. 


집에 오는 길에 아들은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다음에 다시 와야 한다고 하니까 좋아요~~ 했다. 휴 다행이다. 쪼그라든 내 마음이 활짝 펴지는 것 같았다. 비가 와서 싫지 않았냐고 물으니 아이는 비가 와서 더 좋았다고 했다. 비 오는 날에 염소 만나니까 비 맞기 싫어서 얼른 풀만 먹고 집으로 달아나는 것도 봐서 좋았다고 한다. 역시나 내가 농장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 맞다. 6월에 다시 농장에 가면 노란 토마토랑 빨간 토마토를 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님 상추랑 쑥갓은 분명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다음 달에도 직립보행으로 풀을 먹는 토끼를 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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