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Jun 07. 2021

열무김치와 감자된장찌개의 환장할 콜라보

며칠 전, 동네 마트에 갔다. 마트 입구에 4킬로 열무 한 상자가 39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걸 보고 말았다. 사지 않기 위해 마트로 빨리 들어갔다. 장을 보면서도 열무 한 상자가 생각났다.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마트를 돌아다녔다. 모르겠다. 다시 입구로 갔다. 열무 상태만 보기로 했다. 분명 열무가 웃자라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무는 완벽했다. 적당한 길이에 딱 봐도 신선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사기 싫은데. 열무를 사 가면 일이 많아진다. 열무김치를 담글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지 않고 버틴 노력을 생각해서 사지 않아야 했다. 나는 열무를 사지 않기 위해 열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이렇게 고민하고서도 사지 않아야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옆에 알타리까지 보고 말았다. 잘 익은 알타리 김치를 아삭 베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그래도 사면 안된다. 김치 담글 생각을 해 봐. 얼마나 귀찮은지. 그래도 이렇게 좋은 열무가 이렇게 싼데?


결국 열무 한 상자만 샀다. 나름 성공한 장보기였다. 잠시 정신줄 놓으면 알타리까지 들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치거리만 바리바리 사 와서 이틀을 김치만 담갔던 과거를 생각하면 나는 발전하고 있었다. 귀찮아~~를 외치면서 담근 열무김치가 마침 잘 익었다. 햇감자를 넣고 된장찌개도 끓였다. 열무김치가 맛있게 익으면 감자된장찌개를 끓이지 않고 못 배긴다. 이것은 남편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다. 남편은 잘 익은 열무김치를 좋아한다. 남편은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이 둘을 함께 먹는 것은 몇 배로 좋아한다.

저녁밥상을 본 남편의 얼굴이 밝아진다. 남편은 된장찌개에 열무김치를 넣고 밥을 말아먹기 시작한다. 역시 남편은 이 조합을 좋아한다. 내가 남편에게 해주는 많은 반찬 중에 남편이 가장 맛있게 먹는 것이 바로 열무김치와 된장찌개를 함께 할 때이다.


처음 남편이 된장찌개에 열무김치를 말아먹는 것을 보고 나는 기겁했다. 나는 음식이 서로 섞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뷔페에서 접시에 음식을 담을 때도 음식끼리 섞일까 봐 한두 가지만 조심스럽게 담아먹는다. 김장을 한 날에 흰쌀밥에 손으로 찢은 김치를 올려 먹을 때도 흰밥에 김치 양념이 묻을까 봐 숟가락에 밥을 떠서 김치를 조심스럽게 올려서 먹는다. 그런 내 눈에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밥까지 거침없이 말아서 먹는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남편은 한 번만 이렇게 먹어보라고 했다. 결혼 내내 나한테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음식 섞이는 거 싫어해 하면서 나만의 방법으로 먹었다. 된장찌개 한번, 열무김치 한번. 그러다가 작년에 남편은 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들도 이 조합에 완전 넘어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정말 환상적인 맛이라며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비웠다.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두 남자가 얼굴을 파묻고 먹는 것일까. 오랜 금기를 깨고 나는 과감하게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한 조각을 넣었다. 남편은 열무김치를 더 넣어야 한다며 열무김치 한 젓가락을 된장찌개에 넣어주었다. 안돼 안돼 그러지 마!


맛있었다. 솔직히 정말 맛있었다. 말이 안 되는데 맛있었다. 왜 맛있는지 모르겠는데 맛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맛있었다. 결국 나도 얼굴을 파묻고 먹기 시작했다. 다이어트에 치명적인 맛이다. 특히 감자된장찌개와 열무김치는 환장할 조합이다. 감자의 포실포실한 식감과 된장찌개의 구수한 국물, 열무김치의 아삭함이 만나니 밥을 부른다. 여기에 보리밥까지 더하니 최고의 궁합이다. 평소 밥은 두세 숟가락만 먹는 편인데 이 조합은 밥 한 공기다. 배가 불러도 더 먹고 싶은 맛이다. 마음 같아서는 밥 두 공기도 가능할 정도다.


 생각해보면 결혼 17년 동안 남편의 입맛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또 생각해보면 나의 음식은 17년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나는 17년 동안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미역국과 소고기 뭇국을 돌려막기하고 있다. 그 옆에 계절마다 조금 다른 나물반찬을 곁들이는 게 전부다. 그래도 남편과 아들이 잘 먹어주니 도무지 발전이 없는 식단이다.


요즘은 그나마 건강을 핑계로 국물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다. 가끔 국이나 찌개를 끓이면 아들은 아주 좋아한다. 아들은 유독 국물요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국물요리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국물요리는 과식을 부르고, 밥을 빨리 먹게 한다. 국물요리를 줄이니까 나도 편하고, 식사시간도 길어지고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다. 그렇지만 이런 많은 이유에도 열무김치와 감자된장찌개의 환장할 조합은 여름 저녁을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여전히 음식을 섞어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낯선 음식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국여행에 취약하다. 그 나라의 음식을 못 먹으니 빵이나 과일만 먹다가 돌아올 때가 많다. 나는 그 음식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먹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분명 내 입맛에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잠깐 바다에 갔다. 사람들이 많았다. 마스크를 쓰고 아이는 물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했다. 나는 물을 싫어해 라고 하면서 나는 발만 살짝 담갔는데 바닷물이 발에 닿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당연히 물에 안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서 긴바지를 입었는데 무릎 위까지 젖을 정도로 한참을 물에 발을 담그고 걸었다. 마스크 없이 마음껏 바다에서 물놀이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보낸 지난날이 아까웠다. 내가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올해는 처음부터 바다로 휴가를 갈 생각이다. 튜브를 타고 바다 위를 한없이 부유해볼 생각이다.


조금씩 나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걷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보지도 않고 싫어한다고 외면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왜 그 장막에 나를 가두고 있었을까?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시간들이 나에게 새로운 것은 모두 싫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정확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래야 나를 더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베트남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