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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un 08. 2021

그때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남편이 요즘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있다. 나는 이 작가의 책 <금각사>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남편은 책을 읽기 전에 그 책을 쓴 작가와 책에 대한 서평을 꼼꼼하게 읽는 편이다. 그래서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에 대해 나도 조금 알게 되었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천재소년이던 작가는 노벨문학상에 세 번이나 거론되었다고 한다. <금각사>를 읽을 때 나는 작가의 문장이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름다운 소설을 쓴 작가가 훗날 자위대 궐기를 주장하다 할복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할복이라는 말에 15년 전쯤 만난 아이가 생각났다.


나는 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결혼을 하고 다니던 학원은 아파트 단지 근처 상가건물에 있었다. 그 학원에서 일한 지 한두 달 지난날이었다. 수업종이 울리고 교무실을 나가려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문을 여는데 신경을 거슬리는 단어가 들렸다. XX새끼야! 장난스럽게 하는 욕이 아니라 정말 거친 목소리로 심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욕을 한 아이에게 왜 학원에서 욕을 해? 그것도 교무실 앞에서. 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그래서 할복이라도 할까요?


내 말에 그 아이가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다.


뭐?


놀라서 되묻는 말에 아이는 다시 또박또박 대답해줬다.


그래서 할복이라도 해요?


나는 그때서야 그 아이가 보였다. 내가 가르치는 반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키가 나보다 훌쩍 컸다. 얼굴도 중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얼굴이 특별히 불량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가 한 말 때문에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할복이라는 단어를 책이 아닌 일상에서 들은 것은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업을 할 교실로 들어갔다. 걸어가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무 무서웠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고 학원에 등록은 했지만 가끔 오는 학생이라고 했다. 동료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소위 일진이라고 했다. 나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것이다.  


그날 밤 수업이 끝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뒷목이 서늘했다. 뒤돌아 보고 싶은데 무서워서 돌아보지도 못했다.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원 옆 아파트를 지나야 했는데 어두운 길이 있었다. 그 길을 지날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각목으로 머리를 치거나 더 험한 일도 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거의 일주일을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 길을 다녔다.


솔직히 범죄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나는 가끔 그 아이를 생각했다. 영화 속 조폭들의 모습에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쳤다. 그리고 할복이라도 할까요?라고 하면서 나를 내려보던 키 큰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십 대가 되면서 나는 그날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아이도 그저 어린 10대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쎄 보이고 싶어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오기를 부려본 것뿐이었을 그 아이를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어쩌면 마음이 약해서, 그 약한 마음을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서 그렇게 쎈 척을 한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 아이를 오해하고 밤마다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버스정류장으로 뛰다시피 걸어가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때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아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거나 아님 어설프게 훈육하기보다는 그렇게 욕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살다 보면 욕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리도 그런데 아이들이라고 왜 그런 순간이 없을까? 나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심한 욕이 아니라 욕을 하고 싶을 만큼 화가 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많이 부족했던 사람이었다.


그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욕을 내뱉는 것조차도 망설여지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세상에,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인상이 좋았던 그 아이는 아마 그 일대의 훈남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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