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하게 변했다. 여름이 끝난 것 같은 서운함에 벌써부터 가을 우울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나처럼 여름도 미련이 남았는지 주말은 다시 여름, 아직은 여름이니까 힘내라고 하는 것 같다.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쉬워서 서둘러 여름 채소와 과일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그중에서 여름이면 자주 식탁에 올리는 것이 호박잎 쌈이다. 많이 고생하지 않아도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소박하지만 넉넉한 음식이 호박잎 쌈이다.
남편과 아들은 호박잎 쌈을 해 주면 식탁에 앉으면서 와아 를 외친다. 만들기도 간단하고 먹을 때는 행복해지는 최고의 여름 음식이다. 근처에 로컬마켓이 있어서 여름이면 연하고 부드러운 호박잎을 싸게 살 수 있다. 천 원만 줘도 세 식수가 넉넉하게 한 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다.
호박잎은 손질도 간단하다. 뒤에 까실한 가시털을 벗겨내고, 깨끗하게 씻어 체에 무성의하게 올려 쪄주면 끝이다. 나는 호박잎 쌈에 간장 양념장을 곁들인다. 호박잎 쌈을 먹을 때 대부분 강된장을 올려서 먹는데 나는 간장 양념장이 익숙하다. 어릴 때 엄마가 항상 그렇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엄마는 호박잎 쌈에 항상 간장 양념장을 준비했다. 아니면 된장을 풀어서 호박잎 된장국을 끓이기도 했다. 나는 호박잎 된장국보다는 쌈을 좋아해서 우리 가족은 호박잎 된장국은 아직 못 먹고 있다.
잘 삶아진 호박잎에 밥을 올리고 양념장과 함께 먹으면 입안이 향긋해진다. 아들은 6살 때 처음 호박잎 쌈을 야무지게 한 잎 싸 먹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맛있다 라고 말했다. 그때처럼 오늘도 아들은 호박잎 쌈을 야무지게 싸 먹는다. 밥이 조금도 보이지 않게 싸서 입에 쏙 넣고 맛나게 먹어주니 보는 내가 더 맛있다.
"엄마 오늘 호박잎은 더 맛있는 것 같애요."
"그러게. 오늘 유독 부드럽고 싱싱하네. 이렇게 싱싱하고 맛있는 채소를 보면 기분 좋지 않아?"
"기분 좋아요. 냄새도 좋고 맛도 있고 짱이에요."
아들의 말을 우리 부부는 헤벌레 웃으면서 듣는다. 우리 부부는 12살 아들이 밥 먹는 것만 봐도 정신줄을 놓을 때가 많다. 아들은 무슨 반찬을 해줘도 맛있게 먹어준다. 밥에 김치만 올려먹고도 엄지 척을 해주는 아들이 호박잎 쌈을 야무지게 싸서 먹는 모습은 나를 최고의 요리사로 착각하게 한다.
시골에 살다가 부천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호박잎을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하고 큰 마트에서 호박잎을 파는 것을 보고 반가워서 사온 적이 있었다. 양은 얼마 안 되는데 삼천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선뜻 사기가 아까웠다. 시골에서 오며 가며 무심하게 툭 잘라와서 먹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싸게 사온 호박잎은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린 호박잎이 아니라 누렇게 시들고 질기고 억센 것이었다. 결국 한 잎 먹지도 못하고 버렸던 생각이 나서 그 뒤로는 한동안 마트에서 호박잎을 봐도 사지 않았다. 6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로컬마켓에서 여린 호박잎을 넉넉하게 파는 것을 보고 나는 여름마다 이사 잘 왔다 라고 생각했다.
시골에 살 때 호박은 밭에 심지 않는 작물이었다. 밭 옆에 작은 돌무더기나 밭두둑 아래에 돌을 치우고 호박씨 두세 알을 심어두었다. 싹이 나기 전까지는 바가지만 한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주었다. 싹이 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비닐을 치워두기만 하면 호박은 알아서 자랐다. 어느새 커다란 꽃이 피고, 꽃잎 속에 꿀벌이 들락거리는가 싶더니 대추만 한 호박이 열렸다. 그러던 것이 국그릇만 한 호박이 되면 엄마는 호박을 따고 호박잎도 여린 것으로만 뚝뚝 잘라왔다. 동그란 조선호박은 채를 썰어 볶아서 국수 고명으로 올리고 호박잎은 쪄서 쌈을 했다. 호박은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가을이 되면 돌무더기 여기저기 노랗게 익은 호박이 턱 올라가 있다. 씨만 심어주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고 우리에게 여름 내내 넉넉하게 내어주는 것이 호박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호박보다 못한 사람이다. 나는 조금만 베풀어도 생색내고 싶고, 내가 가진 것 남에게 베풀 때도 아까워서 두 번 세 번 생각하는 쪼잔한 사람이다. 내가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내 것을 내어줄 때는 넉넉하지 못한 나보다 호박은 얼마나 큰 세상을 품었는가. 익을수록 더 넉넉해지는 호박과 다르게 나이가 들수록 나는 더 쩨쩨해지고 있다. 시간을 머금고 더 크고 맛있어지는 호박 같은 사람이 되어야 했는데 나는 언제나 호박처럼 넉넉해질 수 있을까? 로컬마켓에는 어느새 늙은 호박도 깨끗하게 손질해서 팔고 있었다. 늙은 호박 속을 숟가락으로 긁어서 부침개로 부쳐먹던 늦여름의 맛이 코끝에 쨍하게 걸린다.
늦은 더위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가을은 기필코 오고 말 것이다. 나는 아직 여름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여름의 끝자락을 여름 채소, 호박잎 쌈을 먹으면서 붙잡고 있다. 호박잎을 사면서 어쩌면 올여름의 마지막 호박잎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년에도 여름은 뜨겁게 와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올해와는 다른 여름일 것이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거리를 걷고, 올해 하기로 했던 바다수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미소리가 시끄러운 저녁에는 소박하게 차린 호박잎 쌈을 먹으면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이 다리를 간지러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