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을 먹으려던 아들이 말했다.
"아니지. 내가 지금 사탕 먹을 때가 아니지."
아들의 다급한 말에 나는 내일 준비물 중에 꼭 챙겨야 할 것이 있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은 다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가서 저녁에 먹다가 남은 알배추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아사삭! 아사삭!
마치 맛있는 감자칩을 먹는 것 같은 소리와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는 아들의 손에 들린 배춧잎 한 장.
아들은 마치 토끼처럼, 아니 아기 염소처럼 배추를 아사삭 아사삭 먹어치우고 있다. 저녁밥을 먹을 때도 양껏 먹었는데도 배추가 사탕보다 맛있다는 것일까? 쌈장도 찍지 않고 깡배추를 드시고 계신다. 조금씩 줄어드는 배추를 아쉬워하면서. 그리고 결국 모든 배추를 다 먹고서야 사탕에 손을 댄다.
아들은 아주 채소를 좋아한다. 저녁에 먹으려고 토마토나 파프리카를 잘라 놓으면 책을 읽던 아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집어 먹어서 저녁상에는 듬성듬성 이빨 빠진 채소가 담긴 접시가 놓여있기 일쑤다. 쑥갓도 봄동도 오이나 배추, 비타민이나 양배추도 모두 깡으로 먹을 때 가장 좋아한다. 조리된 채소도 좋아하지만 오며 가며 집어먹을 때처럼 환희에 찬 표정이 아니다. 아사삭 맛있는 소리도 아니다. 아들은 채소를 과자처럼 먹는 버릇이 있다.
아들이 이렇게 채소를 잘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내 짐작대로 내가 잘 먹여서 그런 것일까? 아들이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나는 무엇을 먹일지는 부모가, 얼마나 먹을지는 아이가 결정하라는 육아서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지켰다.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지 아이는 사탕이나 과자, 주스 같은 주전부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의 간식은 데친 당근이나 애호박, 블루베리나 오이 같은 채소였다. 아이는 이런 채소들을 아주 잘 먹었다. 채소 외에 다른 맛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먹이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아들처럼 너무 자연식만 먹인 아이들이 나중에 과자 맛을 보면 환장한다고 했다. 나는 환장할 때 하더라도 어릴 때는, 조금이라도 늦게 가공식품을 먹이고 싶었다.
6살 때 과자 맛을 본 아들은 과자를 좋아했다. 사탕도 좋아했다. 탄산음료는 안 마셨지만 주스도 좋아했다. 하지만 아들은 채소도 과자만큼 좋아했다. 과일도 사탕만큼 잘 먹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가 과자를 전혀 안 먹는 것이 아니었다. 과자를 잘 먹는 만큼 채소나 과일도 잘 먹는 것이었다. 지금의 아들은 엄마의 바람대로 채소도 과일도, 사탕도 과자도 잘 먹는다. 이제는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도 잘 마신다. 나는 아직 아들이 과자를 먹을 때보다 채소를 먹을 때 아사삭 소리가 더 듣기 좋다. 아들은 결국 채반에 남은 알배추를 모두 먹어치웠다. 배추가 줄어드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아사삭 과자 먹듯 배추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아들이 이렇게 채소를 잘 먹는 것은 타고난 성향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비난에도 꿋꿋하게 아이에게 채소를 간식으로 줬던 나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과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과자에 환장하지는 않는다. 과자 한 봉지를 다 먹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아이가 채소는 남기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과자보다 채소를 더 좋아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과자도 채소도 골고루 잘 먹는 아이로 자라준 아들에게 오늘도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