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족끼리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보지 못한 아들을 위해 코로나도 끝났겠다 발리여행을 계획했다가 시간내기가 어려워서 제주도로 여행지를 변경했다. 5살 때 시댁 식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던 아들, 그 이후 두 번째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아들은 중학생답게 비행기를 타는 것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아니 기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 아들은 제주도 여행 자체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들과 여행이나 캠핑도 많이 하고, 대화도 많이 하려고 나름 애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은 딱 14살의 남자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관심하고 덤덤한 모습으로 여행에 따라나섰다.
비행기를 탄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다. 1시간이면 도착할 제주도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니 마치 유럽이라도 갈 것처럼 설레고 여행이라는 실감도 났다. 창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좌석이라 나는 챙겨간 책을 꺼내 들었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거나 외출을 할 때 언제나 책을 챙겨간다. 이번 여행에서는 짐을 줄이기 위해 1인 1 책으로 정했다. 내가 정한 책은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였다. 작년에 아들이 읽을 때는 별 관심이 없다가 최근에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는 책이었다. 아들이 챙긴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다. 아들은 이미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도 재미있어서 한 권만 가져가야 한다면 이 책으로 하겠다고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나는 구덩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반 넘게 읽었을 정도로 몰입도가 높은 책이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내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기 때문에 한번 더 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 나는 아들에게 책을 넘겼다. 아들은 하늘에서 보는 바깥풍경(창문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이나 하늘을 나르는 거대한 쇳덩이에 대한 경이로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책만 읽었다.
'구덩이'는 지지리 운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사막의 소년원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작품은 많은 반전과 숨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서 읽으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불운이 대물림되는 가문에서 태어나 사막 한가운데서 강제노동을 하는 상황에서도 스탠리는 자신만의 긍정적이고 선한 마음을 잃지 않고 상황을 잘 이겨낸다. 그리고 결국 무죄가 밝혀지면서 소년원에서 우정을 쌓았던 제로와 집으로 돌아오고, 가문의 저주도 풀려서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내가 읽어봐도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든 작품이다.
1시간의 짧은 비행이라 기내식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들은 기내북 한 권을 뚝딱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제주도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 아들의 표정은 비행기에서 '구덩이'를 읽을 때보다 특별히 밝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바다도, 에메랄드빛 바닷물도 아들에게는 크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바닷가를 걸으면서 보게 되는 작은 고동이나 파도치는 바위 사이에서 만난 작은 게 들이 아주 가끔 아들의 얼굴에 짧은 웃음을 남기고 지나갈 뿐이었다. 사실 아들은 평소에도 사람들이 왜 단풍이나 꽃을 구경하려고 차가 막히는 데도 힘들게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아들도 내 나이가 되면 자연이 주는 위로와 감동을 느끼게 될까? 14살이 되면서 점점 더 매사에 시큰둥한 아들과의 제주도 여행에서 아들을 기쁘게 했던 기내북이라도 챙겨간 내가 뿌듯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