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매율 1위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왔다.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낯설었다. 아마도 콘크리트라는 차갑고 삭막한 소재와 유토피아라는 환상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의 만남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연하는 배우들과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믿기로 했다.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극장은 일 년 전에 생긴 극장답게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영화 친구 팝콘과 콜라를 들고 상영관에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설렘을 주었다.
영화는 초반부터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구겨진 종잇장 같은 도시에 황궁아파트만 마치 거짓말처럼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마치 신의 선택을 받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아파트로 몰려드는 외부인들을 모두 차갑게 내쫓는다. 그리고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규범과 삶의 모습을 갖춰간다. 하지만 음식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나 음식을 나누는 과정에서 주민들 사이에 불신이 쌓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갈등은 결국 아파트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영탁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설상가상으로 아파트 외부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트로 쳐들어오면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는 붕괴되고 만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공무원인 민성(박서준)은 그저 조용히 어떻게든 아내인 명아(박보영)와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다. 명아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민성을 불안해하고, 외부인들에게 음식을 몰래 나눠주다가 영탁에게 발각되면서 민성을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한다. 우연한 기회로 주민대표가 된 영탁은 점점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변해가지만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한다. 민성은 살아남기 위해 영탁에게 충성하고,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종교적인 주제를 떠나서 명아가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살기 위해 거칠어지고 악해지는 과정에서도 명아만은 끝내 지진 전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신의 선물처럼 황궁아파트 사람들이 죽어가는 중에도 그녀만은 살아남아 아파트밖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마치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녀의 구원은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다. 영탁에게 영혼을 팔아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구해오는 남편, 민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돌변한 영탁은 옆집 혜원을 절벽으로 밀어서 죽인다. 분명 영탁의 정체를 밝히고 강하게 비난한 것은 명아인데 영탁은 혜원을 죽인다. 혜원이 아니었으면 명아는 영탁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도 몰랐을 텐데도 명아만 구원받은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명아는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선했을까? 혼자서는 음식도 영탁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명아는 그럼에도 악마처럼 변해가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듯 선함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큰 행운이 주어졌을 때 그 행운은 그 사람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 사람이 선하고 바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에게 큰 복이 왔다면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든 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살기 위해, 아내를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민성의 죽음이 그래서 많이 안타까웠다. 누구든 그 상황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변하지 않겠는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들에게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아들은 그 사람들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고 해도 너무 극단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의 말에 나는 공감하면서도 조금 놀랐다. 아들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 아들은 항상 남들과 함께 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항상 약자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했다. 그런 아들이 물론 온 세상이 붕괴된 상황이긴 하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이제 아들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머리가 굵어진 것인지 현실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아들도 알게 된 것 같았다.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을 베풀어도 동화처럼 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들이 알아버린 것 같아서 씁쓸했다.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살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그럼에도 영화는 동화적인 환상 하나를 던져 주고 있다.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과 아파트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끝까지 마음 아프게 지켜보는 명아의 손에 따뜻한 밥을 쥐어준 것이다. 그리고 내쫓길 위험 없이 함께 살아도 되는 안락한 콘크리트를 약속했다.
아들과 황궁 아파트 사람들을 죽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들은 위험한 리더, 영탁이라고 했다. 영탁의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파트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아들의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다른 의견을 덧붙였다. 황궁아파트가 붕괴된 것은 부녀회장의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파트에 들어온 외부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입장이 바뀐다면 우리를 내쫓을 거라는 말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다. 부녀회장이 만든 부정적인 여론이 주민들의 마음에 불안을 심었기 때문에 투표에서 외부인을 내쫓자는 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 불안이 영탁이라는 강력한 존재, 물불 안 가리고 불을 끄기 위해 뛰어든 영탁을 주민대표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아주 종교적이고, 또 정치적인 장치가 많은 작품이었다. 마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모두가 눈이 먼 상황에서도 혼자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끔찍하게 변해 가는 사람들을 홀로 지켜본다. 마치 명아가 변해가는 황궁아파트 사람들을 변하지 않은 인간성으로 지켜보면서 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두가 변했다면 나도 변해야 편하다.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같이 그 상황 속으로 녹아들어야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의사의 아내도, 명아도 모든 것을 보고, 알고 판단하는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고통을 이겨낸 보상을 받는다. 마치 동화처럼.
아파트 안에 스스로를 가둔 주민들의 모습은 아민 그레더의 그림책 [섬]을 연상케 한다. 바다 너머가 두려워서 섬 전체에 성을 쌓아 스스로를 가둔 사람들처럼 황궁아파트는 스스로 섬이 되었다. 그래서 콘크리트 밖에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콘크리트 밖에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진짜 유토피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들은 죽어간다.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영화, 참 머리 복잡한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