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Nov 09. 2023

죽음은 예방주사가 없다.

 어젯밤 9시에 일이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망설였다. 모르는 번호를 보면 다시 전화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보이스피싱이나 광고전화인 경우가 많아서 그냥 모른척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전화를 안 하자니 찝찝한 것이 신경이 쓰였다.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서 보이스피싱이나 광고전화가 중요한 전화로 바뀌는 것도 아닌데도 그러고 있는 내가 바보스러웠다.

 "여보세요?"

 여자목소리였다.

 "부재중전화가 와 있어서 연락드렸는데요."

 "내 목소리 알겠어?"

 역시 보이스피싱이구나 싶었다. 모르겠다고 말하자 그쪽에서 말투를 사투리를 바꿔서 말했다.

 "내다. 기억할랑가 모르겠는데 중학교 같이 다닌 h다. 30년 전이라 기억 안 나제?"

 30년 전이지만 정확하게 기억하는 친구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 할 정도로 말이 없던 아이, 달리기를 잘해서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곤 했던 아이다. 절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아이의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때 친구가 먼저 말했다. 지금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거기서 내 오빠를 만났다고. h의 사촌오빠가 사고사를 당했는데 친정오빠가 그 사촌오빠와 동창이라 장례식에 간 것이었다. 사실 h의 오빠도 친정오빠와 동창이었으니 거기서 다 같이 만났을 것이다.


 친구의 사촌오빠는 사람을 상자로 인식한 로봇기계에 의해 갑자기 사망했다고 한다. 너무 갑작스럽고 황망한 소식에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침통해했다고 한다. 친구도 많 울었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슬프지 않고 황망하지 않은 죽음이 없겠지만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 돌아온다면 가족의 심정이 어떨지 그 슬픔을 생각하니 나도 가슴이 먹먹했다. 고인은 시골에 드물었던 쌍둥이였다. 그래서 누구나 쌍둥이 누구라고 하면 근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얼굴은 알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작고 밝았던 얼굴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많이 짓궂지 않게 밝은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이틀 전에 다른 사람의 부고를 들었다. 남편의 독서모임 회원의 남편이었다. 결혼한 지 일 년 반 만에 남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놀랍고 안타까웠다. 우리 가족은 모두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결혼식장에서 환하게 웃던 부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신혼인 아내를 두고 떠나는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남편은 신부의 지인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제는 상주가 된 아내분을 뵙고 왔다고 했다.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겨낼 거라고, 젊으니까 살 거라고 믿었다. 고인도 마지막까지 이겨낼 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울면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아내분이 결혼식에서 아들이 써준 카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써준 카드에 그러겠다고 답하지 못하겠다고. 울면서 말하는 그분 옆에서 남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축하카드를 써준 것마저도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일주일에 두 번의 부고를 들으면서도 충격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았다. 너무나 다른 죽음이지만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떠난 두 분이 모두 먹먹하게 마음을 눌렀다. 죽음은 참으로 예방주사가 없다. 아무리 자주 죽음을 접해도 적응이 되거나 무뎌지지 않는 게 죽음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죽음에 대해 지나칠 만큼 무심했다. 외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내 가족이나 친척의 장례식에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학교에 안 오는 것이 신기하고 마치 먼 별에서 들려오는 소식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잊힐만하면 나를 찾아왔다. 친정아빠가 심장마비로 55세에 돌아가신 그해에 3개월 만에 친구의 부고를 받았다. 2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였다. 그때 이미 결혼을 한 그 친구의 시어머니가 눈물로 며느리의 사망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세 달 간격으로 전해 들은 두 사람의 죽음이 두배로 아픈 것이 아니라 몇백 배, 아니 몇천 배가 아픈 것 같았다. 몸에 있는 물이 모두 눈물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눈물을 쏟아냈다.


 요즘은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 가끔 남편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과연 내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에 대해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이 어떻게 나에게 올지,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해 우리가 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질까? 그때는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두렵지 않을까? 우리가 죽음이 두려운 것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죽음이 끝이라는 사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끝이 아니라 사후가 있다면 그곳은 어떨지 모르니까 두렵다. 끝이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과 영원히 끝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렵다. 아무리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을 목격해도 죽음은 두렵고 안타깝고 무겁다. 죽음만큼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면서 이제는 울 힘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분들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고 있다. 나의 지금이 감사하고 그 감사함이 죄송한 밤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돈심으로 크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