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한 달 만에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부고를 듣는 순간에도 내가 결혼하는 날까지 쩌렁쩌렁하게 집안을 울리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같았다. 전화를 한 엄마의 목소리에는 이미 오열의 흔적이 묻어났다. 눈물이 뚝뚝 묻어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독하게 엄마를 괴롭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설마 엄마는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절대 슬퍼서 울면 안 된다.
남편과 장례식장으로 가면서도 나는 할머니의 죽음보다 엄마의 눈물에 슬퍼했다. 할머니의 죽음이 엄마가 울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끝없는 물음을 던졌다. 89년을 살았다면 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누군가의 죽음은 애도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세상이 슬퍼하는 것이 불편했다. 나조차도 마음이 너무 편안한다는 것에 놀라울 지경이었다. 운전을 하던 남편은 자꾸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슬퍼서 울지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맞벌이였던 부모님 대신 할머니 손에 자란 남편에게 할머니는 엄마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했다. 항상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남편을 사랑으로 키워주셨다고. 그런 남편에게 슬픈 척 연기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 조문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상조회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 육개장을 먹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장례식은 산만하고 정신없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정신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공기 속을 떠돌고 있는 탓일 것이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주름진 뽀얀 피부에 생전에 잘 짓지 않던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할머니의 희미한 미소에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할머니가 그럴 리가 없는데 누가 저런 사진을 찍었을까. 아마 고모나 사촌들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그나마 웃었다면 그들 앞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마른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버지와 달리 오열하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아이고 형식적인 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오열하고 있었다. 엄마의 몸속에 있는 할머니와의 시간들을 100도 씨로 끓여서 눈물과 소리를 뿜어내듯 애끓는 소리 때문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놀라움이나 엄마가 느끼는 슬픔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배신감 때문이었다. 엄마는 무엇이 슬퍼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일까. 혹시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숨기려고 크게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무이 흑흑 어무이 흑흑.”
엄마의 울음소리는 장례식장의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할머니의 웃음 띤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절을 했다.
“에잇 썩어 죽을 년.”
할머니의 까끌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쏟아졌다.
“내가 너한테 쌀씻으라카더나. 와 일을 만드니 와? 가마이 있도 못하고 별나 별나. 에잇 썩어 죽을 년.”
6살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한 손으로 쌀이 든 바구니를 번쩍 드는 모습이 신기했다. 할머니처럼 한 손으로 쌀이 든 바구니를 들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가려다가 마당에 쌀을 쏟고 말았다. 내가 처음으로 썩어 죽을 년이라는 욕을 들었던 날이다. 아니 아마 그전에도 들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마당에 쏟아진 쌀이 흙과 대조를 이루면서 묘하게 이쁜 그림처럼 보였다. 어쩌면 흐린 하늘에 하얀 구름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쌀을 손으로 긁어모아 바가지에 다시 담기 시작했다. 에잇 썩어 죽을 년 별난 년. 할머니의 입도 할머니의 손만큼 바빴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할머니의 손을 보고 있었다. 쌀을 쓸어 모으고 있었지만 반은 흙이었다. 저 쌀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나는 서서 생각했다. 흙이 많아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악착스럽게 단 한 톨의 쌀도 남기지 않고 박박 흙과 함께 바가지에 담았다. 당연하겠지만 할머니가 그 쌀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얼굴에 뒤통수에 손끝에 쏟아지던 썩어 죽을 년이라는 말을 받아냈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기억해 내고 나서는 쉬웠다. 8살 때 양말을 빨려고 수돗가에서 양말에 비누칠을 하다가 때 묻은 발바닥에만 비누칠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모를 심다가 허리가 아파서 일어섰을 때 허리도 없는 게 일하기 싫어서 일어난다며. 실수로 깨뜨린 그릇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지 않아서 썩어 죽을 년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나는 정말 썩어 죽을 년이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서 죽을 사람이라는 말이 주는 공포를 안고 살아갔다. 나는 지금도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할 때면 할머니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그 말을 듣는다.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져 깨진 접시를 쓸어 담거나 심지어는 힘 조절을 잘못해서 꽝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힐 때도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나의 작은 실수나 장난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질책은 학교나 직장에도 따라올 정도였다. 그것은 절대 내 몸이 썩어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은 내 무의식의 공포가 만들어낸 환청같은 것이었다. 또한 어린 나이에 뭔가 해 보려고 하는 모습을 조금의 애정이나 온기없이 바라보던 할머니의 냉기 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사랑 따위 없어도 산다고 장담하면서도 나는 왜 할머니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의 울음이 지쳐갈 때쯤 바통을 이어받듯 요란하게 고모가 등장했다. 고모의 모습이 나타나기 전부터 나는 고모가 등장하는 요란한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고모는 늘 요란하게 등장했다. 몇 년에 한 번 집으로 할머니를 보러 올 때도 마치 이산가족 상봉처럼 요란하게 현관 밖에서부터 할머니를 부르고 들어왔다. 엄마아아 나왔어 엄마 엄마 나 보고 싶었지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그렇게 보고 싶고 불쌍한 엄마를 만나러 좀 오지 그랬어요. 나는 속으로 고모한테 묻곤 했다.
“아이고 엄마 무신 일이고 엄마 갑자기.”
고모는 등장과 함께 요란한 곡을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만해라고 말렸을 고모부도 오늘은 참담한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할머니를 웃게 했던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나보다 2살 위인 기훈오빠는 웃음을 담은 얼굴 탓에 오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나와 동갑인 기선이 따라 들어왔다. 6년 만에 본 기선의 모습은 놀랍게 달라져 있었다. 기선은 어릴 때부터 삐쩍 말라서 뼈와 살이 하나처럼 보이던 아이였다. 밥은 전혀 먹지 않았고 과자나 빵 같은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신경질이 많고 날카로운 바늘 같은 성미 때문에 어릴 때도 기선이 방학에 집에 다니러 와도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괜히 바늘꽂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선은 몸무게가 두 배는 늘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출산 후에 살이 많이 찐 것 같았다. 오늘은 아이와 남편은 집에 있다고 했다.
“언니 이게 무신 일이고? 저번 생신 때도 멀쩡했던 사람이 무신 일이고?”
엄마는 대답 없이 퉁퉁 부어서 앞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언니 말해 보소. 일이 날라믄 기미가 있었을 낀데 연락도 없이 이래도 되나?”
“고모 아침에 어머니 방에 갔을 때 이미 이래 된 거 보고 바로 연락한 거라. 전화로도 말했지만.”
“아이고 엄마 임종 지키는 자슥도 없이 혼자 갔나? 자슥이 있으면 뭐하노. 아이고.”
고모의 곡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나는 그때까지 무거운 표정으로 목례와 악수를 하고 있던 남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서였는데 사촌들이 눈치도 없이 따라 나왔다. 11월의 오후는 적당히 추웠다. 마치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내 슬픔의 온도 같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할머니가 나를 아끼는 온도처럼 차가운 것이다. 아니 슬픔의 각도를 정확하게 재보면 아마 슬프지 않음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슬픔에 조금이라도 가깝도록 각도를 조절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분명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기쁨보다는 조금이라도 슬퍼야 하니까. 기훈오빠와 기선이는 마치 결혼식에서 우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왔다. 기선이는 새침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의 어린이집 엄마를 대하듯 나를 대했다. 기선의 이런 변화는 두 사촌이 할머니의 죽음을 나보다 슬퍼하지 않는 것만큼 나를 놀라게 했다.
“결혼했다며? 가보지도 못했네. 남편?”
기선은 편한 친구 대하듯 말했다. 시선을 남편에게 주면서도 표정이 편안했다. 기선에게 결혼과 출산이 준 것은 저 표정일 것이다. 기선의 얼굴에 웃음이 보였다. 여기가 장례식장이 아니라고 생각할 웃음이었다. 어쩌면 장례식이라는 생각 때문에 소리는 참았는지도 모를 웃음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진호라고 합니다.”
“인상 좋으시네요? 야 너 결혼 잘했다.”
나는 여전히 기선의 이런 넉살이 낯설었다. 마치 기선의 시간이 나와 다르게 흘러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만난 지 5분도 안 됐는데 결혼 잘했는지 어떻게 알아? 점쟁이냐?”
나도 모르게 말에 가시가 돋쳤다. 기선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딱 보면 알지 모르냐? 사람 인성 얼굴에 다 나오는 거야. 그럼 벌써 결혼 잘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말문이 막혔다. 새침해서 누구와도 두 마디 이상 말을 하지 않던 기선은 자주 만나는 친구 같은 태도로 말했다.
“벌써 후회하나 봐요. 잘해주세요.”
기선은 남편에게 나를 부탁했다. 살가운 사촌을 걱정하는 듯한 기선이 나는 고맙기보다 불편했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많이 놀라고 슬프시겠어요.”
남편이 기선을 위로했다. 기선의 얼굴 어디에도 운 흔적이나 슬픈 기색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느낀 배신감을 다시 느꼈다.
“기선이는 많이 슬퍼야지. 기훈오빠도. 그렇지?”
“당연히 슬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안 슬프냐?”
얼굴이 웃는 상이라 정말 슬퍼도 웃고 있을 것 같은 기훈오빠가 말했다. 정말 저 얼굴 때문에 슬퍼 보이지 않는 걸까? 남매는 일하다가 잠시 커피타임 갖는 것처럼 느긋했다.
“기훈오빠 할머니가 많이 많이 이뻐했잖아. 기선이도 그렇고.”
“야 너도 이뻐했지.”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할머니 사랑이 뭐가 그리 좋은 거라고. 야 힘들었다 나.”
기훈오빠는 지나가듯 말했지만 그 말이 나는 귀에 거슬렸다.
“오빠가 왜 힘들었어? 그렇게 할머니가 좋아죽는 외손잔데.”
“야 말도 마라. 할머니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 나 가출하고 싶었어. 내 친구들이 할머니 욕쟁이 할머니라고 할 정도야.”
기훈오빠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 남매가 사실은 할머니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조금 할머니의 인생이 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순간적인 감정이라 금방 마음에서 사라질 감정이었다.
“참 나 할머니한테 절도 안 했다. 같이 들어가서 절하고 밥이나 먹자.”
기선이의 말에 기훈오빠도 기선을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의 사랑의 온도가 나에게도 사촌들에게도 같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배고프면 들어갈까?”
“아니. 난 괜찮아.”
남편과 나는 병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오는 구급차를 말없이 보며 서 있었다.
다시 빈소에 들어갔을 때는 할머니의 장지문제로 시끄러웠다. 할아버지를 모신 선산이 멀어서 가까운 추모관을 알아보자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때까지 어무이를 외치며 곡을 하던 고모는 마치 스위치를 끈 것처럼 울음을 멈췄다.
“무신 말이고? 와 어무이를 길도 설고 낯도 선 데로 모시? 당연히 아부지 옆으로 가야제.”
“그렇긴 한데 너무 멀어서 자주 못 찾는 것보다는 가까운 추모관에 모시고 더 자주 찾아뵙는 게 낫지.”
고모의 성질을 아는 고모부가 조용하게 설명을 했지만 고모의 귀에 고모부의 말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한번 작정하면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고모였다. 그 싸움의 대상이 우리 가족이면 일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모가 나선 이상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추모관을 알아뒀던 아버지는 급하게 선산이 있는 시골에 연락을 했다. 급하게 사람을 구하고 선산에 모실 차비를 했다. 장례버스를 타고 5시간이 넘는 시간을 내려갔다.
버스 안에서 보는 바깥풍경은 버스에 탄 사람들의 표정처럼 흐리고 칙칙했다. 눈이 아니라도 비라도 을씨년스럽게 내릴 것 같은 날이었다. 우리는 모두 말이 없었다. 오직 고모만이 여전히 넘치는 기운으로 울고 소리치고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길이 좁아서 장지까지 버스는 갈 수 없었다. 1톤 트럭에 관을 싣고 장지로 올라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서 올라갔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지만 사람들은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마치 추운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서로의 안부를 전하느라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고모가 원하는 대로 할아버지 바로 옆자리에 할머니가 묻혔다. 할머니와 결혼 생활이 힘들어서 자살했다는 할아버지가 이 선택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오래된 낮은 무덤 옆에 벌거벗은 새 무덤이 나란히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장례식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아직은 적응되지 않는 낯선 동네와 낯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열대과일을 먹었을 때처럼 익숙하지 않은 달콤함이었다. 오직 내 손으로 가꿀 내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매일 잡지와 인터넷을 찾아보고 소품들을 사들였다. 새 직장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매일이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또 한 달이 지나갔다.
전셋집이지만 거실 천장의 등은 바꿔달고 싶었다. 가구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지루한 모양의 커버를 바꾸고 싶었다. 며칠째 조명가게를 드나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버스에서 보는 풍경이 좋았다. 창문으로 빗물이 작은 시내를 이루면서 흘렀다. 그 모습을 한참을 보고 있었다. 건물과 지나가는 자동차, 우산을 쓴 사람들이 모두 젖어 있었다. 에잇 썩어 죽을 년. 한참을 풍경에 취해 있던 내 귀에 갑자기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풍경에서 내 가슴 끝 어딘가로 파고드는 소리로 갑자기 끌려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밭에 감자나 고구마를 심으러 가자고 했다. 특히 나를 데리고 갈 때가 많았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왜 항상 나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감자를 심을 때도 언제나 할머니는 화를 냈다. 싹이 난 부분을 위로 심으라고 말했다. 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싹이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나를 꾸중하던 소리, 그 소리가 빗물을 타고 내 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마치 빗물처럼. 그리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왔다.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내 눈물이 슬픔인지 화인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대책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울음소리가 날까 봐 참았지만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쉽게 멈추지 않는 눈물이었다. 내 울음은 노래가 되었다. 노랫소리가 내 울음에 맞춰 들려왔다. 가사가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 같은 가락이었다. 감자밭에 풀을 뽑을 때도 할머니는 나를 데려갔다. 할머니는 밭일을 할 때면 항상 노래를 불렀다. 가사가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 같은 노래였다. 나는 라디오처럼 반복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풀을 뽑았다. 할머니와 나는 언제나 일정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때의 할머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완전히 조용한 것보다 노랫소리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코를 휭하고 풀었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했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지금 내가 버스에 앉아서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우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풀을 뽑다가 우연히 할머니를 봤을 때 알았다.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그 눈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쥐어짜듯 슬픈 노래였다. 나는 비가 오는 버스에서 그 노래를 하고 있다. 도무지 멈추지 않는 노래를 하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이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립지도 않았다. 그냥 감자밭에서 부르던 할머니의 노래 때문에 눈물이 흐를 뿐이었다. 언제가 내가 엄마한테 물어봤다. 왜 할머니는 밭에 갈 때 항상 나를 데려가냐고. 그때 엄마가 말했다. 무서워서 그러는 거라고. 할머니는 혼자 밭에서 일하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해가 지려고 하면 바로 집으로 온다고 했다. 엄마도 할머니 노래 들어본 적 있냐고도 물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노래를 모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