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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12. 2024

이런 미친 1

 일주일 넘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외출할 일이 있어서 비가 계속 오면 불편을 감수하고 나가야 할까 망설이다가 날이 갠 것을 보고 집을 나섰다.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장마 끝의 공기는 일주일 동안 내린 비의 물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처럼 숨쉬기도 힘들 만큼 습했다. 아침부터 후덥하게 더워서 인중에 벌써 땀이 맺혔다. 그래도 우산을 써도 흠뻑 젖는 장맛비를 피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그 두 개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지키는 보행자는 거의 없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등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항상 이렇다. 누구나 무단횡단을 해도 끝까지 파란불을 기다려서 건넌다. 그리고 파란불이 깜빡깜빡 신호가 바뀔 준비를 하는 것을 멀리서 본다고 해도 절대로 뛰어서 건너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설령 급한 일이 있다고 해도 신호등과 한 약속은 지키자는 것이 내가 지키는 몇 안 되는 약속 중 하나이다.     

한낮의 지하철은 한가했다. 종착역에서 전철을 탄 덕에 빈자리가 많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휴대폰으로 행선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북콘서트에 가기 위해 따로 산 책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많지 않은 내가 그래도 오랫동안 신작이 나오면 찾아서 읽는 작가의 책이다. 작가의 신작이 나오고 오늘이 첫 북콘서트날이라 책을 챙겨 왔다. 작가의 북콘서트를 가끔 찾아서 다니지만 따로 사인을 받지는 않는다. 오늘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북콘서트를 잘하지 않는 작가라 꼭 사인을 받을 작정을 하고 가는 길이다. 책을 읽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앞의 사람들을 보았다. 지하철의 사람들은 대부분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잠깐 지하철을 둘러보고 다시 책을 읽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잠깐 본 지하철 풍경 속에서 낯선 풍경을 본 것 같아서였다. 지하철 문 앞, 노약자석 앞에 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빈자리가 많은데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시선을 끌었다. 다시 보니 남자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듯 울면서 손에 든 휴지인지 손수건인지 모를 것으로 눈물을 닦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을 만큼 남자는 슬프게 울었다. 한껏 쪼그린 자세에도 남자의 키가 커 보였다. 피부가 하얗고 선해 보이는 인상의 호남형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가 울고 있는 이유 몇 가지를 추측해 보았다. 저렇게 서럽게 운다는 것은 가족의 죽음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을 앞에 두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실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남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가 앞자리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분도 젊은 남자의 눈물을 본 것 같았다. 우리 둘의 시선의 끝에는 그 남자가 겪은 슬픔의 이유를 묻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계속 그 남자를 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문장 끝에 울고 있는 젊은 남자의 앉은 모습이 마침표처럼 찍혔다.       

책을 읽다가 그랬는지 그 남자를 생각하다가 그랬는지 내려야 하는 을지로 3가 역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나는 급하게 책을 덮고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나는 내리지 못했다. 한 역을 더 가서 을지로 3가 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전철에서 내렸다. 늦을까 봐 서둘러 걷던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내 앞에 지나가는 사람이 낯이 익어서였다.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누군지도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가던 길도 멈추고 그 여자가 가는 방향으로 갔다. 나가는 길인지 그 여자는 계단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가서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는 위치까지 갔다. 역시 내가 아는 사람이 맞았다. 낯이 익은 얼굴인데 분명 아는 얼굴인데 도무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지 어디서 봤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소리쳤다.  

“선희쌤!”

내 목소리가 커서인지 아니면 선희쌤이 맞았는지 그녀가 돌아봤다. 누가 자기를 불렀는지 확인하려는 듯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나를 보고 멈췄다.

“윤경쌤?”

확신이 없는지 그녀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변해 있었다. 성형을 해서 외모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련된 화장과 차림새에도 알아볼 만큼 그녀의 외모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외모 외의 모든 것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이지만 가격이 가늠이 안될 만큼 비싸보였다. 그녀가 든 가방도 한눈에 알아볼 가격이 꽤 나가는 명품가방이었다. 흐트러짐 없이 세팅해서 세련된 단발머리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까지 마치 바비인형의 10년 후의 모습이 저럴까 싶었다.

“윤경쌤 맞아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쌤 못 알아볼뻔했어요.”

“제가 좀 늙었죠? 쌤은 하나도 안 변했어요.”

하나도 안 변했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서 그 편의점 건물의 건물주가 된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에게 들으니 묘하게 자격지심이 생겨났다. 10년 동안 너는 어떻게 살았길래 그때만큼이나 평범하고 구질한 모습이냐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게다가 10년을 거꾸로 보낸 것 같은 모습으로 늙었다고 말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쌤 우리 어디 가서 커피 한잔 해요.”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어디 가는 길 아니에요?”

“쌤 만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혹시 쌤 지금 바빠요?”

그녀는 마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과 아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생각지 못한 반가움이었다.

“아니, 난 일이 있긴 한데.”

“급한 일 아니면 잠깐만 이야기하고 가요. 너무 반가워서 그래요.”

그녀는 정말로 얼굴에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나는 김선희, 그녀의 10년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벼르고 나온 북콘서트를 포기하기가 망설여졌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듯 지하철 입구를 나가 카페로 들어갔다. 1층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큰 창으로 도로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려다 보였다. 평일 낮에도 서울의 도로는 바쁘게 지나가는 차들로 복잡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통유리로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으니까 유리창 넘어와 카페 이쪽이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진동벨이 울렸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그녀가 주문한 라테와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쟁반을 들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그녀가 잔을 들어 뜨거운 라테를 마셨다. 가늘고 하얀 손이 부드럽게 컵을 감듯이 감싸 쥐는 모습이 마치 백조가 춤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손톱에는 연한 핑크색 네일을 하고 약지에는 작고 예쁜 반지를 하고 있었다. 카페에 오는 동안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리 10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던 것처럼 우아하고 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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