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뜨거운 국물음식을 찾아 나는 순댓국집으로 들어섰다. 퇴근시간을 넘긴 지가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 어쩌면 영업시간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나는 길에 본 적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말 영업이 끝난 시간인 듯 식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가게를 정리하던 사장이 인사를 했다. 영업 끝났다는 말을 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뜻밖의 환영을 받은 나는 혹시라도 사장이 말을 바꿀까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식당은 순댓국집답지 않게 바형식의 긴 테이블과 4인 자리가 함께 있는 구조였다. 나는 혼밥하기 편한 바에 앉아서 순댓국과 소주를 주문했다. 키오스크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사장은 이미 내가 주문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장은 김이 나는 뜨거운 뚝배기와 양파, 고추가 담긴 작은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놨다. 곧이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내왔다. 나는 소주부터 잔에 따랐다. 시원하고 깨끗한 한잔이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저녁을 굶은 내 뱃속을 타고 내려가는 쩌릿함이 기분 좋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뜨거워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이상하게 공복에 마시는 소주, 데일 듯 뜨거운 국물이나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좋아했다.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지금처럼 마시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려고 보니 공깃밥이 없었다.
“사장님 공깃밥은 따로 주문하나요?”
내가 앉은 바 건너편에서 주방을 정리하고 있던 사장에게 물어보는 방법으로 공깃밥을 주지 않은 사장의 실수를 상기시켜 주었다. 내 말에 사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을 봤다. 자신의 실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곧바로 밥그릇을 내 앞에 놓고 다시 사장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얼굴은 지쳐서 쉬고 싶은 얼굴인데 행동은 느긋했다. 마치 내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대로 밤을 새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동작이었다.
“혹시 영업시간 끝난 거 아니에요? 저 때문에 가게 열어두고 계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어색하기도 하고 혼자 밥 먹자니 심심하기도 해서 괜히 너스레를 떨며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조리대를 행주로 닦고 또 닦고 있던 사장이 손을 멈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마음 편히 식사하세요.”
사장은 서비스가 담긴 말을 하고는 다시 행주로 조리대를 닦았다. 가게 영업은 끝났고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도 못 닫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영업시간을 묻기도 뭐해서 얼른 먹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뜨거운 국물을 쉬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순댓국을 먹으면서 둘러본 가게는 순댓국집 특유의 분위기가 없었다. 마치 일본 우동집처럼 바 형태의 긴 테이블이 있어서 혼밥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분위기였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에 예쁜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카페처럼 깔끔한 연한 레몬 색상의 벽에는 어딘지 도시적인 분위기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장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안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이런 분위기의 식당이 음식은 그저 그럴 때가 많은데 순댓국도 전문가의 정성이 담긴 맛이었다. 냄새 없이 깔끔한 국물과 고기가 듬뿍 들어가서 한 끼 잘 대접받은 기분이 들게 하는 음식이었다.
“국물이 아주 맛있네요.”
서둘러 먹고 나가겠다는 마음과 달리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혼자 밥 먹는 것에 익숙한데도 오늘 밤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았다.
“맛있다니 감사합니다. 어머니께 오래 배워서 맛이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그런데 댁에서 사모님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얼른 먹고 나가야 사장님 집에 빨리 갈 텐데 뜨거워서 잘 안되네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집에 일찍 가기 싫어서 미적대고 있던 중입니다.”
“아니 왜요? 댁에서 기다리실 텐데요.”
“그래서요. 자꾸 기다리는 것 같아서 들어가기가 겁나네요.”
이건 무슨 말일까? 나는 사장의 아내가 어지간히 밤마다 사장을 볶아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음이 났다.
“사장님 그럼 소주 한잔 하시겠습니까? 저도 느긋하게 한잔하고 싶은데요.”
“네. 그럼 한잔만 받겠습니다.”
사장이 주방에서 잔을 가지고 나와 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우리는 잔을 들어 말없이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웠다. 나는 사장의 빈 잔에 소주를 다시 따르고 내 잔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말없는 건배를 나누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사장도 술이 고팠는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사모님이 사장님 어지간히 좋아하시나 봅니다. 애타게 기다리신다니.”
“아.. 저 사별했습니다.”
사장이 망설이며 말했다. 순간 나는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럼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아이들이 기다린다면 더 일찍 들어가야 옳았다. 사별했다는 말을 하고 사장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술을 따라 이번에는 혼자 마셨다. 사별한 지 오래 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말없이 국물을 떠먹으면서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장은 말이 없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세 살 아들과 잠들어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가 살아있고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순대국물보다 더 내 속을 데우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내가 죽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미연의 얼굴이 지나갔다. 아내에게 회식한다고 전화를 하고 미연의 오피스텔로 간 것에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회식한다고 했으니 술냄새를 풍기겠다고 들른 순댓국집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놈인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내와의 사별을 상상했을 때, 아내의 얼굴에 미연의 얼굴이 겹치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치 급할 때 쓸 비상금이라도 숨겨놓은 기분이었다. 미연이 내가 유부남인 것을 알고도 만나는 것을 보면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나이가 나와 별 차이 안 나 보이는 사장이 사별이라니. 젊은 나이에 번듯한 가게를 가진 사장이 내심 부러웠는데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느리게 내려갔다. 아내도 있고 애인도 있는 내가 사장보다 행복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내와는 자녀가 없으셨나 봐요.”
시간이 11시가 넘은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아이가 있다면 서둘러 집에 가려고 할 텐데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 와서 내 옆에 앉는 사장을 보니 아이가 없으니 집에 더 가기 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새로 딴 소주를 내 잔에 따르고 자기 잔에도 따랐다. 사장과 손님이 아니라 같이 술 한잔 하러 온 술친구가 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있어요. 그것도 셋이나.”
“네? 세명이나. 와. 그럼 얼른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지요. 얼른 들어가야지요.”
대답도 하고 술잔을 단숨에 비우는 사장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구나 싶었다.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처럼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으로 사는 사람도 말하기 시작하면 책 한 권이 모자랄 판이다. 사장은 어쩌면 내가 자꾸 자신의 사정을 물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딱히 어떤 표현을 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보고 있나 봐요.”
“네. 아이들 외할머니가 돌보고 있습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일찍 혼자되시고 외동인 아내 키우면서 평생 혼자 외롭게 사셨거든요. 사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어요. 어쩌다 아이가 셋이나 태어나고 가게도 저 혼자 하기 벅차서 아내가 같이 나와 있었거든요. 파트타임으로 일하러 오는 직원이 있긴 했지만 아내 없이 하기에 힘들더라고요. 직원들에게만 맡기기 힘든 일도 있고 해서. 장모님께 신세를 지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장모님을 모시기로 결심했는지 사장이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아내가 없는데도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니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들 셋이야 본가로 들어가거나 할머니한테 맡기면 될 텐데 무슨 사연일까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돌아가신 사모님이 좋아하시겠어요. 혼자 남겨질 어머니 걱정 많이 했을 텐데.”
“글쎄요. 좋아했을까요? 어차피 아이들 셋 제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나가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아이들도 외할머니 잘 따르고 저도 마음 편히 일하니 좋죠. 그럼요. 다 잘된 일이지요.”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도 사장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 단숨에 소주잔을 비워내는 것도 이상했다. 분명 사장에게 무슨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궁금해서 애가 탈 지경이었다. 죽은 아내의 장모를 모시고 사는 사위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평범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처가살이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한동안 사장은 말이 없었다. 뭔가 더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면서 나도 말없이 소주를 마셨다. 사장이 다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사장은 급하게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이제는 누가 사장이고 누가 손님인지 경계가 애매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일 끝나고 집에 가면 거의 매일 장모님과 맥주타임을 즐겼어요. 아내는 맥주를 좋아했어요. 아이들 다 재우고 셋이서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야식 시켜 먹는 것이 낙이었어요. 아내는 다른 술은 입에도 안 대는데 맥주만 좋아했어요. 아내 보내고 한동안 나는 맥주는 입에도 안 댔어요. 맥주만 보면 아내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여기까지 말하고 사장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 남자 술이 어지간히 고팠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속엣말을 쏟아낼 지나가는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슨 말로 사장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빈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매일 집에 들어가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따듯하게 차려진 저녁을 준비해 주는 아내가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기다리는 집이 있는 내가 위로하기에 사장의 아픔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나는 따뜻한 가정과 짜릿한 사랑을 양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 닫고 집에 가니까 장모님이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준비해 놓으셨더라고요. 아내는 없지만 예전처럼 맥주 한잔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맥주타임이었습니다. 장모님은 맥주 한잔 마시고 울고, 저도 옆에서 같이 울고 눈물을 마시는지 맥주를 마시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내가 보고 싶어서인지 저는 그날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됐어요. 장모님도 마찬가지로 많이 취하도록 마신 것 같더군요.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아내생각이 더 나서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마시고 또 마시고 밤새 마셔도 마음이 채워질 것 같지 않더라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아내에 대한 사장의 그리움이 깊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죽고 흙이 마르기도 전에 웃는 게 남자라는데 이 사장은 정말 순정파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 나도 저렇게 슬퍼할까 다시 생각해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겠다 싶었다.
“아내분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지금도 사장님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겠어요. 차라리...”
나는 차라리 재혼을 하는 것이 어떠신지 말하려다가 말았다. 저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재혼을 생각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애가 셋이나 되니 누가 저 사장과 결혼하려고 할지 현실적인 문제가 많아 보였다. 아직은 애들이 어리니까 장모님이 애를 돌보면서 지내는 지금이 나은 선택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소주를 들이켰다. 차갑고 쓴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가 없는 처가살이를 하는 사장의 속이 어떨까 생각하니 가게문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보고 싶고 걱정돼서라도 서둘러 갈 텐데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처가살이가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명절이나 생신 때만 찾아가서인지 불편하고 어색하게 지내는 장모님 얼굴이 생각났다. 내 딸 눈에 눈물 나면 지옥에 가서도 용서 안 하겠다고 농담처럼 하는 말에 매번 등골이 서늘했다. 장모님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농담처럼 하지만 그 말은 항상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인 사람이었다. 장모님이 미연이의 존재를 안다면 정말로 지옥까지라도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런 장모님과 아내도 없이 한집에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차라리 서울역이 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번듯한 가게를 차리고 사는 것도 대단하지만 사별한 아내의 홀어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사장이야말로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다.
다시 빈술병을 치우고 사장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벌써 4병째였다. 이 사장 오늘 집에 안 갈 작정인가 싶었다. 나는 아내한테 미연이 만나고 온 것 숨기려고 소주 냄새나 풍기려고 들렀는데 졸지에 다른 의미의 회식을 하게 된 셈이었다. 나도 술을 어지간히 즐기지만 그래도 이쯤 해서 사장을 집으로 들여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빠를 하루 종일 기다릴 테니 집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은 딱 한 병만 더 마시고 가자며 소주병의 목을 땄다. 취기가 올랐는지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사장도 나처럼 소주가 단 맛이 나서 더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주라도 마셔서 고된 하루 장사에 지친 몸도, 아내에 대한 애타는 마음도 잊고 싶은 것이겠지. 나는 사장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사장은 많이 취한 것처럼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도 평소보다 많이 마신 탓인지 고달픈 사장의 인생이야기 탓인지 평소보다 취기가 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술에 취해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내 방이 아니라 장모님의 방에서 잤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술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화장실에서 안 잔 게 어딥니까?”
나는 사장의 말에 농담으로 대꾸했다.
“제가 속옷도 걸치지 않고 있더군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왜 옷을 다 벗고 잔 거야 이상했지만 술 마시고 열이 올라서 옷을 벗고 잘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도 술 많이 마시면 홀랑 벗고 잘 때도 있어요. 잠결에 화장실 갔다가 더워서 옷도 벗고 방도 착각했나 보네. 그럴 수 있어요.”
“옆에 장모님도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자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팔을 두르고 잠든 장모님을 보는데 첫 몽정을 할 때보다 더 놀랐다면 믿으시겠어요?”
무슨 말인가? 장모님이 왜 나체로 사장옆에서 자고 있었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당기면서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설마 사장이 죽은 아내의 장모와 관계라도 가졌다는 말인가. 술이 깰 만큼 충격적이긴 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에 아파했던 사장의 고통이 사실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쪽이 더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나는 빈 속에 마시는 쓴 커피처럼 찌릿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매료됐다.
“그럴 수도 있지요. 뭐 별일이야 있었겠습니까? 술에 취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곯아떨어졌을 텐데요.”
나는 제발 내 말대로 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남은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다. 설마 내 말대로 그냥 잠만 잔 것은 아니겠지. 그것만 가지고도 찝찝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더 이야기가 있어야 사장의 늦은 귀가가 설명될 것 같았다.
“저는 장모님이 깨지 않게 방을 나왔습니다. 등골이 서늘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습니다.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내려고 해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어요. 저는 그냥 술 취해서 방을 잘못 들어가서 잤겠거니 생각했어요.”
사장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목이 타는지 소주를 들이켜고 급하게 물 한잔을 다 비웠다. 다소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뭔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했다가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그런 일이야 술 마시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죠. 그래도 장모님 얼굴 보기는 불편하셨겠어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맛이었습니다. 다행히 장모님이 깨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지 알몸으로 눈이라도 마주쳤으면 생각도 하기 싫었어요. 그날부터 저는 장모님이 잠들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늦게까지 가게에 있었어요. 애들도 자고 장모님이 잠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가려고 매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거죠.”
“그래도 매일 그렇게는 살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어색한 것도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나는 뻔한 말로 사장을 위로했다. 사장은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장모님을 피하다가 그날은 가게 영업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갔어요. 오랜만에 애들 얼굴도 보고 삼겹살에 소주도 한잔 했습니다. 장모님도 그전과 다름없이 저를 대해주시니 괜찮았어요. 며칠 후에 장모님이 저녁이 부실하다며 시킨 보쌈에 맥주를 한잔 하자는 겁니다. 거절하기도 그렇고 나도 맥주 생각이 났던 터라 장모님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또 장모님 방에서 알몸으로 깬 겁니다. 그때부터는 이제 장모님과 맥주는커녕 밥도 먹기가 겁나더군요. 내가 장모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싶어서 겁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장모님은 기회만 있으면 맥주타임이라며 술상을 차리는데 정말 죽을 맛입니다. 장모님 얼굴도 보기 죄송하고 애들이나 애들 엄마한테도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요새는 입맛도 없고 미치겠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사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잠이 든 것인지 말하고 나니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속을 너무 보인 것 같은 후회 때문인지 사장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사장이 장모와 어디까지 갔는지 상상하며 뜬금없이 미연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미연을 안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품은 사장과 나 사이에 내가 이긴 것 같은 묘한 승리감 때문이었다. 사장이 돌아오기를 술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을 사장의 장모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지만 나를 웃으면서 맞아주는 젊고 예쁜 미연의 상황이 묘하게 오버랩됐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우는지 자는지 모를 사장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애들이랑 그 집에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진저리를 쳤다. 나는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사장옆에서 술을 한병 더 마셨다. 취기가 올라 걷기도 힘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서 사장을 깨웠다. 사장은 깊이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금세 일어나서 취했는데도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순대가게 앞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미연의 오피스텔로 갈까 고민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빨리 집으로 가서 여전히 내 옆에 있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꼭 안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택시웹을 열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금방 도착메시지가 왔다. 택시에 타자 술이 확 올라서 눈이 감겼다.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몽롱하고 노곤했다. 택시 안인데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포근했다. 택시에서 나는 디퓨저향이 좋았다.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향이었다. 기분 좋은 향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뜬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택시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내 옆에서 미연이 벗은 몸을 반쯤 이불에 덮고 잠들어 있었다. 분명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왜 이리로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결에 미연이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미연의 젊고 탄력 있는 몸은 덮고 있는 이불처럼 부드러웠다. 이불을 끌어올려 미연에게 덮어주면서 나는 아내에게 외박의 이유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든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 것이다. 미연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침대에서 나오면서 어젯밤 그 사장은 어떻게 됐을지 생각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갔을까? 집으로 갔다면 사장의 장모님은 맥주를 사놓고 사장을 기다렸을까? 사장의 장모가 매일 기다리는 맥주타임을 사장도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옷을 챙겨 입은 나는 미연의 오피스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