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뜨거운 국물음식을 찾아 나는 순댓국집으로 들어섰다. 퇴근시간을 넘긴 지가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 어쩌면 영업시간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나는 길에 본 적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말 영업이 끝난 시간인 듯 식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가게를 정리하던 사장이 인사를 했다. 영업 끝났다는 말을 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뜻밖의 환영을 받은 나는 혹시라도 사장이 말을 바꿀까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식당은 순댓국집답지 않게 바형식의 긴 테이블과 4인 자리가 함께 있는 구조였다. 나는 혼밥하기 편한 바에 앉아서 순댓국과 소주를 주문했다. 키오스크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사장은 이미 내가 주문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장은 김이 나는 뜨거운 뚝배기와 양파, 고추가 담긴 작은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놨다. 곧이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내왔다. 나는 소주부터 잔에 따랐다. 시원하고 깨끗한 한잔이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저녁을 굶은 내 뱃속을 타고 내려가는 쩌릿함이 기분 좋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뜨거워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 이 순간을 좋아했다. 이상하게 공복에 마시는 소주, 데일 듯 뜨거운 국물이나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좋아했다.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지금처럼 마시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려고 보니 공깃밥이 없었다.
“사장님 공깃밥은 따로 주문하나요?”
내가 앉은 바 건너편에서 주방을 정리하고 있던 사장에게 물어보는 방법으로 공깃밥을 주지 않은 사장의 실수를 상기시켜 주었다. 내 말에 사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을 봤다. 자신의 실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곧바로 밥그릇을 내 앞에 놓고 다시 사장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얼굴은 지쳐서 쉬고 싶은 얼굴인데 행동은 느긋했다. 마치 내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대로 밤을 새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동작이었다.
“혹시 영업시간 끝난 거 아니에요? 저 때문에 가게 열어두고 계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어색하기도 하고 혼자 밥 먹자니 심심하기도 해서 괜히 너스레를 떨며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조리대를 행주로 닦고 또 닦고 있던 사장이 손을 멈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마음 편히 식사하세요.”
사장은 서비스가 담긴 말을 하고는 다시 행주로 조리대를 닦았다. 가게 영업은 끝났고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도 못 닫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영업시간을 묻기도 뭐해서 얼른 먹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뜨거운 국물을 쉬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순댓국을 먹으면서 둘러본 가게는 순댓국집 특유의 분위기가 없었다. 마치 일본 우동집처럼 바 형태의 긴 테이블이 있어서 혼밥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분위기였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에 예쁜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카페처럼 깔끔한 연한 레몬 색상의 벽에는 어딘지 도시적인 분위기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장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안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이런 분위기의 식당이 음식은 그저 그럴 때가 많은데 순댓국도 전문가의 정성이 담긴 맛이었다. 냄새 없이 깔끔한 국물과 고기가 듬뿍 들어가서 한 끼 잘 대접받은 기분이 들게 하는 음식이었다.
“국물이 아주 맛있네요.”
서둘러 먹고 나가겠다는 마음과 달리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혼자 밥 먹는 것에 익숙한데도 오늘밤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았다.
“맛있다니 감사합니다. 어머니께 오래 배워서 맛이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그런데 댁에서 사모님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얼른 먹고 나가야 사장님 집에 빨리 갈 텐데 뜨거워서 잘 안되네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집에 일찍 가기 싫어서 미적대고 있던 중입니다.”
“아니 왜요? 댁에서 기다리실 텐데요.”
“그래서요. 자꾸 기다리는 것 같아서 들어가기가 겁나네요.”
이건 무슨 말일까? 나는 사장의 아내가 어지간히 밤마다 사장을 볶아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음이 났다.
“사장님 그럼 소주 한잔 하시겠습니까? 저도 느긋하게 한잔하고 싶은데요.”
“네. 그럼 한잔만 받겠습니다.”
사장이 주방에서 잔을 가지고 나와 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내 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우리는 잔을 들어 말없이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웠다. 나는 사장의 빈 잔에 소주를 다시 따르고 내 잔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말없는 건배를 나누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사장도 술이 고팠는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사모님이 사장님 어지간히 좋아하시나 봅니다. 애타게 기다리신다니.”
“아.. 저 사별했습니다.”
사장이 망설이며 말했다. 순간 나는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럼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아이들이 기다린다면 더 일찍 들어가야 옳았다. 사별했다는 말을 하고 사장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술을 따라 이번에는 혼자 마셨다. 사별한 지 오래 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말없이 국물을 떠먹으면서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장은 말이 없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세 살 아들과 잠들어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가 살아있고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순대국물보다 더 내 속을 데우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내가 죽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미연의 얼굴이 지나갔다. 아내에게 회식한다고 전화를 하고 미연의 오피스텔로 간 것에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회식한다고 했으니 술냄새를 풍기겠다고 들른 순댓국집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놈인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내와의 사별을 상상했을 때, 아내의 얼굴에 미연의 얼굴이 겹치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치 급할 때 쓸 비상금이라도 숨겨놓은 기분이었다. 미연이 내가 유부남인 것을 알고도 만나는 것을 보면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나이가 나와 별 차이 안 나 보이는 사장이 사별이라니. 젊은 나이에 번듯한 가게를 가진 사장이 내심 부러웠는데 역시 세상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느리게 내려갔다. 아내도 있고 애인도 있는 내가 사장보다 행복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