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는 자녀가 없으셨나 봐요.”
시간이 11시가 넘은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아이가 있다면 서둘러 집에 가려고 할 텐데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 와서 내 옆에 앉는 사장을 보니 아이가 없으니 집에 더 가기 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새로 딴 소주를 내 잔에 따르고 자기 잔에도 따랐다. 사장과 손님이 아니라 같이 술 한잔 하러 온 술친구가 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있어요. 그것도 셋이나.”
“네? 세명이나. 와. 그럼 얼른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지요. 얼른 들어가야지요.”
대답도 하고 술잔을 단숨에 비우는 사장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구나 싶었다.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처럼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으로 사는 사람도 말하기 시작하면 책 한 권이 모자랄 판이다. 사장은 어쩌면 내가 자꾸 자신의 사정을 물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딱히 어떤 표현을 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보고 있나 봐요.”
“네. 아이들 외할머니가 돌보고 있습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일찍 혼자되시고 외동인 아내 키우면서 평생 혼자 외롭게 사셨거든요. 사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어요. 어쩌다 아이가 셋이나 태어나고 가게도 저 혼자 하기 벅차서 아내가 같이 나와 있었거든요. 파트타임으로 일하러 오는 직원이 있긴 했지만 아내 없이 하기에 힘들더라고요. 직원들에게만 맡기기 힘든 일도 있고 해서. 장모님께 신세를 지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장모님을 모시기로 결심했는지 사장이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아내가 없는데도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니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들 셋이야 본가로 들어가거나 할머니한테 맡기면 될 텐데 무슨 사연일까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돌아가신 사모님이 좋아하시겠어요. 혼자 남겨질 어머니 걱정 많이 했을 텐데.”
“글쎄요. 좋아했을까요? 어차피 아이들 셋 제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나가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아이들도 외할머니 잘 따르고 저도 마음 편히 일하니 좋죠. 그럼요. 다 잘된 일이지요.”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도 사장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 단숨에 소주잔을 비워내는 것도 이상했다. 분명 사장에게 무슨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궁금해서 애가 탈 지경이었다. 죽은 아내의 장모를 모시고 사는 사위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평범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처가살이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한동안 사장은 말이 없었다. 뭔가 더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면서 나도 말없이 소주를 마셨다. 사장이 다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사장은 급하게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이제는 누가 사장이고 누가 손님인지 경계가 애매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일 끝나고 집에 가면 거의 매일 장모님과 맥주타임을 즐겼어요. 아내는 맥주를 좋아했어요. 아이들 다 재우고 셋이서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야식 시켜 먹는 것이 낙이었어요. 아내는 다른 술은 입에도 안 대는데 맥주만 좋아했어요. 아내 보내고 한동안 나는 맥주는 입에도 안 댔어요. 맥주만 보면 아내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여기까지 말하고 사장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 남자 술이 어지간히 고팠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속엣말을 쏟아낼 지나가는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슨 말로 사장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빈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매일 집에 들어가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따듯하게 차려진 저녁을 준비해 주는 아내가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기다리는 집이 있는 내가 위로하기에 사장의 아픔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나는 따뜻한 가정과 짜릿한 사랑을 양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 닫고 집에 가니까 장모님이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준비해 놓으셨더라고요. 아내는 없지만 예전처럼 맥주 한잔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맥주타임이었습니다. 장모님은 맥주 한잔 마시고 울고, 저도 옆에서 같이 울고 눈물을 마시는지 맥주를 마시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내가 보고 싶어서인지 저는 그날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됐어요. 장모님도 마찬가지로 많이 취하도록 마신 것 같더군요.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아내생각이 더 나서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마시고 또 마시고 밤새 마셔도 마음이 채워질 것 같지 않더라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아내에 대한 사장의 그리움이 깊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죽고 흙이 마르기도 전에 웃는 게 남자라는데 이 사장은 정말 순정파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 나도 저렇게 슬퍼할까 다시 생각해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겠다 싶었다.
“아내분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지금도 사장님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겠어요. 차라리...”
나는 차라리 재혼을 하는 것이 어떠신지 말하려다가 말았다. 저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재혼을 생각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애가 셋이나 되니 누가 저 사장과 결혼하려고 할지 현실적인 문제가 많아 보였다. 아직은 애들이 어리니까 장모님이 애를 돌보면서 지내는 지금이 나은 선택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소주를 들이켰다. 차갑고 쓴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가 없는 처가살이를 하는 사장의 속이 어떨까 생각하니 가게문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집에 갈 생각을 안 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보고 싶고 걱정돼서라도 서둘러 갈 텐데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처가살이가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명절이나 생신 때만 찾아가서인지 불편하고 어색하게 지내는 장모님 얼굴이 생각났다. 내 딸 눈에 눈물 나면 지옥에 가서도 용서 안 하겠다고 농담처럼 하는 말에 매번 등골이 서늘했다. 장모님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농담처럼 하지만 그 말은 항상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인 사람이었다. 장모님이 미연이의 존재를 안다면 정말로 지옥까지라도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런 장모님과 아내도 없이 한집에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차라리 서울역이 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번듯한 가게를 차리고 사는 것도 대단하지만 사별한 아내의 홀어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사장이야말로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