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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27. 2024

맥주타임 3

다시 빈술병을 치우고 사장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벌써 4병째였다. 이 사장 오늘 집에 안 갈 작정인가 싶었다. 나는 아내한테 미연이 만나고 온 것 숨기려고 소주 냄새나 풍기려고 들렀는데 졸지에 다른 의미의 회식을 하게 된 셈이었다. 나도 술을 어지간히 즐기지만 그래도 이쯤 해서 사장을 집으로 들여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빠를 하루종일 기다릴 테니 집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은 딱 한 병만 더 마시고 가자며 소주병의 목을 땄다. 취기가 올랐는지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사장도 나처럼 소주가 단 맛이 나서 더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주라도 마셔서 고된 하루 장사에 지친 몸도, 아내에 대한 애타는 마음도 잊고 싶은 것이겠지. 나는 사장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사장은 많이 취한 것처럼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도 평소보다 많이 마신 탓인지 고달픈 사장의 인생이야기 탓인지 평소보다 취기가 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술에 취해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내 방이 아니라 장모님의 방에서 잤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술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화장실에서 안 잔 게 어딥니까?”     

나는 사장의 말에 농담으로 대꾸했다.      

“제가 속옷도 걸치지 않고 있더군요.”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왜 옷을 다 벗고 잔 거야 이상했지만 술 마시고 열이 올라서 옷을 벗고 잘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도 술 많이 마시면 홀랑 벗고 잘 때도 있어요. 사장님 잠결에 화장실 갔다가 더워서 옷도 벗고 방도 착각했나 보네. 그럴 수 있어요.”     

“옆에 장모님도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자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팔을 두르고 잠든 장모님을 보는데 첫 몽정을 할 때보다 더 놀랐다면 믿으시겠어요?”     

무슨 말인가? 장모님이 왜 나체로 사장옆에서 자고 있었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당기면서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설마 사장이 죽은 아내의 장모와 관계라도 가졌다는 말인가. 술이 깰 만큼 충격적이긴 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에 아파했던 사장의 고통이 사실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쪽이 더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나는 빈 속에 마시는 쓴 커피처럼 찌릿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매료됐다.      

“그럴 수도 있지요. 뭐 별일이야 있었겠습니까? 술에 취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곯아떨어졌을 텐데요.”  

나는 제발 내 말대로 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남은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다. 설마 내 말대로 그냥 잠만 잔 것은 아니겠지. 그것만 가지고도 찝찝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더 이야기가 있어야 사장의 늦은 귀가가 설명될 것 같았다.      

“저는 장모님이 깨지 않게 방을 나왔습니다. 등골이 서늘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습니다.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내려고 해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어요. 저는 그냥 술 취해서 방을 잘못 들어가서 잤겠거니 생각했어요.”     

사장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목이 타는지 소주를 들이켜고 급하게 물 한잔을 다 비웠다. 다소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뭔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했다가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그런 일이야 술 마시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죠. 그래도 장모님 얼굴 보기는 불편하셨겠어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맛이었습니다. 다행히 장모님이 깨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지 알몸으로 눈이라도 마주쳤으면 생각도 하기 싫었어요. 그날부터 저는 장모님이 잠들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늦게까지 가게에 있었어요. 애들도 자고 장모님이 잠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가려고 매일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거죠.”     

“그래도 매일 그렇게는 살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어색한 것도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나는 뻔한 말로 사장을 위로했다. 사장은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장모님을 피하다가 그날은 가게 영업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갔어요. 오랜만에 애들 얼굴도 보고 삼겹살에 소주도 한잔 했습니다. 장모님도 그전과 다름없이 저를 대해주시니 괜찮았어요. 며칠 후에 장모님이 저녁이 부실하다며 시킨 보쌈에 맥주를 한잔 하자는 겁니다. 거절하기도 그렇고 나도 맥주 생각이 났던 터라 장모님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또 장모님 방에서 알몸으로 깬 겁니다. 그때부터는 이제 장모님과 맥주는커녕 밥도 먹기가 겁나더군요. 내가 장모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싶어서 겁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장모님은 기회만 있으면 맥주타임이라며 술상을 차리는데 정말 죽을 맛입니다. 장모님 얼굴도 보기 죄송하고 애들이나 애들 엄마한테도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요새는 입맛도 없고 미치겠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사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잠이 든 것인지 말하고 나니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속을 너무 보인 것 같은 후회 때문인지 사장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사장이 장모와 어디까지 갔는지 상상하며 뜬금없이 미연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미연을 안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품은 사장과 나 사이에 내가 이긴 것 같은 묘한 승리감 때문이었다. 사장이 돌아오기를 술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을 사장의 장모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지만 나를 웃으면서 맞아주는 젊고 예쁜 미연의 상황이 묘하게 오버랩됐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우는지 자는지 모를 사장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애들이랑 그 집에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진저리를 쳤다. 나는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사장옆에서 술을 한병 더 마셨다. 취기가 올라 걷기도 힘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서 사장을 깨웠다. 사장은 깊이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금세 일어나서 취했는데도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순대가게 앞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미연의 오피스텔로 갈까 고민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빨리 집으로 가서 여전히 내 옆에 있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꼭 안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지만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택시웹을 열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금방 도착메시지가 왔다. 택시에 타자 술이 확 올라서 눈이 감겼다.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몽롱하고 노곤했다. 택시 안인데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포근했다. 택시에서 나는 디퓨저향이 좋았다.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향이었다. 기분 좋은 향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뜬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택시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내 옆에서 미연이 벗은 몸을 반쯤 이불에 덮고 잠들어 있었다. 분명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왜 이리로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결에 미연이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미연의 젊고 탄력 있는 몸은 덮고 있는 이불처럼 부드러웠다. 이불을 끌어올려 미연에게 덮어주면서 나는 아내에게 외박의 이유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든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줄 것이다. 미연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침대에서 나오면서 어젯밤 그 사장은 어떻게 됐을지 생각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갔을까? 집으로 갔다면 사장의 장모님은 맥주를 사놓고 사장을 기다렸을까? 사장의 장모가 매일 기다리는 맥주타임을 사장도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옷을 챙겨 입은 나는 미연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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