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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05. 2024

소나기

 병훈은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끝날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벌써 세 번째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갈 뿐 대답이 없다. 분명 지수는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어제 불금이라며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게 뻔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 가득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보였다. 여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더운 날씨지만 아직은 5월이다. 5월의 하늘은 가을하늘만큼이나 맑고 쨍하게 푸르렀다. 잠시 하늘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었다. 가슴께가 기분 좋게 간질간질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하늘을 본 게 어제였는지도 까마득하다. 어둑한 새벽에 집을 나서서 다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와 잠만 자던 몇 달이었다. 일처리 못하는 후임 교육에 성질 더러운 부장 놈 비위 맞추면서 야근까지 하느라 하늘이 여전히 내 머리 위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주말에는 암막 커튼치고 자느라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몰랐다. 데이트다운 데이트 언제 하냐고 삐지던 지수도 톡으로 안부만 전해오고 있다. 그렇게 보낸 몇 달 만에 하늘을 봐서인지 유난히 낯설고 예뻤다. 이런 날을 집에서만 보내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병훈은 일어나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까지 피곤해 죽겠다 싶던 몸이 갑자기 날아갈 듯 개운했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샤워를 마치고 한참을 골라 옷을 입었다. 병훈은 차를 몰아 지수의 집으로 달렸다.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다. 길이 막혀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있게 주변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하늘에는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것처럼 구름이 떠 있었다. 사람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웃으면서 걷고 있었다. 지수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병훈은 지수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오전 10시, 아직 숙취에서 깨기 이른 시간이다. 더 자게 두고 혼자 산책을 하려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너무 집요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끊을까 고민하는 동안에도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여보세요?”

 포기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지수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에서 숙취의 괴로움이 느껴졌다.

 “자기야 아직 자?”

 “응? 자기 뭐야? 왜케 일찍 전화야?”

 지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만난 연인에 대한 무심함을 담은 목소리였다. 연애 3년 차, 이제는 주말에 집 앞으로 찾아와도 감흥이 없다.

 “일찍 아니야. 벌써 열 시가 넘었어. 자기야 창밖에 봐. 날씨 죽여.”

 지수는 답이 없었다.

 “자기 자? 지수야!”

 “아니. 안 자. 그래서 뭐 날씨가 왜?”

 “자기야 눈곱만 떼고 나와. 날씨도 좋은데 우리 공원에서 산책이라도 하자.”

 지수는 더 자고 싶다고 했지만 병훈은 오늘이 세기에 다시 오지 않을 하늘을 볼 마지막 기회라는 거창한 뻥으로 지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오늘도 반려견 코코와 깔맞춤한 옷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야구모자를 쓴 지수는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뻤다. 월요일은 월요병 때문에 화요일에는 화병 때문에 수요일에는 적응했으니까 매일이유를 만들어서 술을 마셔대는데도 예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목줄을 한 코코를 품에 안고 지수가 차에 탔다. 병훈은 오는 길에 스타벅스에서 사 온 아이스 돌체라테를 건넸다. 지수만의 해장법이었다. 지수는 한 모금에 라테 반잔을 비웠다.

 “아 이제 정신이 든다. 고마워 자기야!”

 “어제 많이 마셨어? 몇 시에 들어간 거야?”

 어제 열 시에 2차 간다는 짧은 통화 후에도 지수는 술과 흥을 찾아 밤거리를 헤맨 모양이었다. 매일을 불금처럼 보내는 지수지만 금요일은 더 진심이었다.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자기 언제부터 날씨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어?”

 “오늘부터?”

 병훈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공원에는 돗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수는 코코의 목줄을 잡고 걸었다. 그 옆을 병훈도 천천히 걸었다. 코코는 밖에 나온 것이 좋은지 풀냄새를 맡으면서 볼일을 보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면서 경쾌하게 걸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만나면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워하거나 짖으면서 탐색했다. 파마한 것 같은 갈색털을 가진 코코는 품에 꼭 안길 만큼 작고 귀여운 강아지다. 코코는 자기보다 큰 강아지가 가까이 오면 꼬리를 내리고 옆으로 비켜 걸었다. 순한 성격 탓에 다른 강아지나 사람을 물거나 사납게 굴지 않았다. 병훈과 지수는 손을 잡고 코코가 가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셨다. 정말 투명한 유리병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맑은 날이었다. 그때 풀숲을 탐색하던 코코가 갑자기 사납게 짖으면서 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지수가 목줄을 놓치고 말았다.

 “코코야 어디가?”

 병훈과 지수는 코코를 부르면서 따라 달렸다. 너무 빨리 달려서 쉽게 코코를 잡을 수가 없었다. 코코는 산책로를 벗어나 공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병훈과 지수가 불렀지만 멈출 생각이 없는지 더 빨리 달렸다. 공원 끝까지 달려간 코코는 공원 밖으로 나가 인도를 가로질렀다. 많지는 않았지만 차들이 달리고 있는 차도가 바로 앞이었다.

 “코코야 안 돼!”

 병훈이 코코를 다급하게 불렀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코코가 차도로 달려갔다. 도로 중간까지 가는 동안 다행히 달려오는 차는 없었다. 코코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코코야!”

 지수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코코가 도로 중앙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차가 코코를 그대로 치고 달렸다. 코코의 작은 몸은 낮게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지수가 비명을 질렀다. 병훈은 그 자리에 멈췄다. 바로 눈앞에서 보는 풍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수는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도 않고 코코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차를 피했지만 위험한 상황이었다. 병훈은 손으로 차를 제지하면서 지수를 향해 뛰었다. 지수는 피투성이가 된 코코를 안아 올렸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훈은 지수의 어깨를 안아 도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지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코코와 맞춰 입은 지수의 노란 티셔츠에 피가 묻어있었다. 병훈은 여전히 지수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수는 코코를 품에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알람소리에 병훈은 눈을 떴다. 알람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쓴 병훈은 다시 잠을 청했다. 알람이 울렸으니 아침 9시라는 의미지만 병훈은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았다. 코코가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일 년이 지났다. 그날 여전히 따뜻한 코코를 안고 지수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코코를 치고 간 사람을 찾아야겠다는 지수의 말에 병훈은 공감하지 못했다.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물을 치고 간 자동차도 뺑소니가 되는지도 병훈은 알지 못했고, 자기가 고양이나 강아지를 치었다고 뺑소니범이라고 불린다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그런 말을 지수에게 하지는 않았다. 병훈은 그저 지수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것이 맑은 날씨를 핑계로 지수와 코코를 공원으로 끌고 나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뺑소니 신고에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시민의 지팡이답게 조사하는 시늉을 해줬다. CCTV를 확인해서 뺑소니를 찾아달라고 울면서 말하는 지수의 모습은 과장해서 말하면 부모 잃은 표정이었다. 지수의 눈물은 시종일관 무심한 경찰의 피곤한 듯한 표정을 더 코믹하게 했다. 경찰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절망적인 표정이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코코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반려동물 장례업체에 연락해서 화장 가능 시간을 예약했다. 그날 밤, 코코를 품에 안은 채 지수는 잠들지 못하고 울었다. 병훈이 차려준 아침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예약 시간에 맞춰 장례업체를 찾아가서 화장을 했다. 어떤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지수는 마치 팬터마임 배우 같았다. 지수는 병훈에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병훈이 부축하는 대로 기대고 눈물을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수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 헤어져.”

 집 앞에서 내린 지수는 집으로 올라가려는 병훈에게 말했다.

“뭐? 무슨 말이야? 헤어지자니. 갑자기?”

“갑자기 아니고 계속 생각했어?”

 지수는 마음의 결정을 끝낸 듯 차분했다.

“이유가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다시 자기 보면서 웃고 좋아할 자신이 없어. 자기가 나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코코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솔직히 뺑소니범보다 자기가 더 원망스러운데 어떻게 더 만나? 자기 보면서 코코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잘 가.”

지수는 가루가 된 코코를 안고 그렇게 집으로 올라갔다. 병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에 병훈이 떠올린 것은 지수도, 코코도 아니었다. 뺑소니범을 잡아달라고 울면서 말하는 지수를 보던 경찰관의 얼굴이었다. 병훈은 그제야 그 경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것 같았다. 그깟 개새끼 때문에 이 난리야.     

다시 병훈이 눈을 뜬 것은 11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휴대전화를 켰다. 몇 개의 카톡이 와 있었다. 시시한 광고 사이로 재민의 톡이 있었다. 날씨도 좋은데 집에 박혀서 뭐 하냐 주말에 낚시나 가자는 내용이었다. 가볍게 씹어줄까 하다가 주말에 비 오면 연락하라고 답하고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지고 일어났다. 세수라도 하고 와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재택을 하는 병훈의 최소한의 근무 자세였다.  

일 년 전, 그렇게 헤어지고 지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병훈은 이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깟 개새끼 때문이라는 생각이 순간순간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병훈은 맑은 날에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회사도 재택근무로 바꾸고 암막커튼으로 햇빛을 가리고 지냈다. 그래도 꼭 나가야 하는 일이 생겨서 날이 좋은 날 외출을 하면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비 오는 날에는 신호도 안 걸리고, 평소에 늘 막히던 길도 막히지 않았다. 부장 놈도 비 오는 날은 잔소리 없이 한 번에 결제해 줬다. 그런데 맑은 날에 나가면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 하늘이 눈부시게 파래서 산책 삼아 걷자 하면 개똥을 밟았다. 횡단보도 신호가 아슬아슬해서 뛰다가 발목을 삐어서 병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맑은 날은 유난히 도를 아는지 묻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소소한 불행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맑은 날에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착각한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계속 반복되는 불행에 병훈은 이 모든 것이 코코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는 지경이 되었다. 날씨 좋다고 공원에 가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지수 품에서 간식 먹으면서 살아있을 자기를 죽게 만든 자신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자 병훈은 집 밖에 나가는 것이 싫은 것을 넘어서 공포스러워졌다. 그런데 날씨 좋다고 카톡이라니. 지난 장마에 전집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한 말을 진짜 술안주 삼아 목구멍으로 넘긴 것이 분명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 말은 귓등으로 듣던 놈이었다.      


 새로 맡은 일은 대형 학원 홈페이지 제작이었다. 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수학 일타강사의 학원이라고 했다. 날씨 좋은 날 외출은 어렵지만 집에서는 일이 더 잘 되는 편이었다. 한 시간 집중해서 작업하던 병훈은 냉장고를 열었다. 아침을 건너뛴 탓인지 허기가 졌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물 외에 언제 먹다가 넣어뒀는지 모를 피자 한 조각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병훈은 배달앱을 켰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먹을 것이 없는 메뉴들을 고르는데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커튼을 젖히고 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배달을 시킬까 나갈까 고민하던 병훈은 대충 겉옷만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내린 비였다. 오늘 안 나가면 언제 또 외출할 수 있을지 몰랐다. 평소 먹고 싶었던 냉면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른 메뉴는 배달시켜 먹어도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병훈이 일 년씩 은둔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우수한 배달 문화 덕분이었다. 원하면 삼시 세 끼를 배달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생필품들도 새벽이면 집 앞에 갖다 주는 친절한 나라, 한국이었다.  물론 냉면도 배달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병훈은 일 년 전까지 단골이었던 평양냉면과 집에서 재회했을 때의 실망감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초등학교 시절 얼굴이 유독 하얘서 좋아했던 여자아이를 어른이 돼서 만났을 때와 같은 충격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얀 얼굴이 커피색깔이 된 것처럼 냉면은 한 덩이 주먹밥 같은 몰골이었다. 병훈은 비가 오는 날은 무조건 집을 나갔다. 그리고 별일이 없으면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산 위로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어지간해서 그칠 것 같지 않은 비였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혼자 우산을 쓰고 걷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십오 분을 걸어 멀리 평양냉면집이 보였다. 병훈은 갑자기 배가 고파서 조금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허기를 느꼈다. 걸음이 빨라졌다. 슴슴한 냉면육수를 들이키는 상상만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식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오늘 안에는 그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소나기였는지 금세 하늘이 밝아졌다. 순간적으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기왕 나온 거 냉면만 먹고 가자는 생각에 식당 앞으로 서둘러 걷던 병훈은 자신이 또 코코의 저주에 걸린 것을 알았다. 정기휴무라는 팻말이 식당 문에 걸려 있었다. 유리문으로 보이는 식당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순간 더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훈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이,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해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서 병훈은 비틀대듯 걸었다. 식당 문이 닫힌 것으로 불행은 끝났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는데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정류장은 텅 비어있었다. 비가 그쳐서인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병훈은 버스정류장으로 들어가 앉아서 잠시 쉬고 싶었다. 아니 걸을 기운도 없었다. 배도 고프고 먹고 싶던 냉면을 못 먹게 된 허탈함에 짜증이 솟구쳤다. 잠시 버스 정류장에 쉬어 간다고 한들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다. 병훈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우산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병훈의 신발에 떨어졌다. 신발이 젖지 않게 우산을 들어 옆으로 옮겼다. 누군가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병훈은 이제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순간 병훈은 옆구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쇠꼬챙이가 옆구리에 박힌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한 남자가 병훈의 앞에 서 있었다. 병훈의 옆구리에 칼을 꽂은 채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병훈은 의식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저 남자가 누군지 생각했다.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병훈이 모르는 남자였다. 병훈은 한번 본 사람은 잊어버리는 일이 별로 없었다. 모르는 남자가 왜 자기를 찔렀는지 병훈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병훈은 자기가 여기서 죽는다면 저 남자 때문인지 아니면 일 년 전에 죽은 코코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병훈이 옆으로 쓰러지고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른 사람이 자신을 찌른 남자인지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오던 여자였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왜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병훈은 눈을 감았다.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이른 여름의 햇살은 눈부시게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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