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에서 내린 나는 낯선 거리 풍경에 두리번거렸다. 미리 길을 검색했지만 지도와 실제 거리는 차이가 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꺼내 길 찾기를 했다. 편의점을 끼고 들어가서 300 미터 앞이 목적지였다. 편의점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전철역에서 나와서 직진이라고 했으니 일단 직진해 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전철역 바로 앞이라고 했던 편의점은 한참을 걸어가서야 나왔다. 편의점을 끼고 300미터는 얼마나 가야 하나 싶었는데 얼마 걷지 않아서 찾던 건물이 나왔다. 건물 앞에 도착한 나는 모임장에게 건물 앞에 도착했다는 톡을 보냈다. 미리 초대된 단톡방에서 알려준 대로 톡을 남기고 벨을 눌렀다. 잠시 후에 공동현관문이 열렸다. 주택가에 위치한 5층 연립주택은 새로 지은 건물인지 깨끗하고 공동현관이 비밀번호로 여닫는 방식이었다. 모임장이 톡으로 모임장소의 호수를 알려왔다. 3층이었다. 겉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계단은 좁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래도 건물은 전체적으로 깨끗한 느낌이었다. 벨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리고 모임장이 얼굴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짧게 자른 까만 머리가 잘 어울리는 젊은 여자였다. 모임을 만들고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모임장소를 첩보영화처럼 알려주는 것을 보고 여자일 거라고 짐작은 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긴 테이블과 여섯 개 정도의 의자가 있는 거실은 좁았다. 어느 지점에서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마주치면 서로 양보해야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거실이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조금은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다시 그들은 이야기에 몰두했다. 테이블 위에는 향초와 크리스털 느낌을 낸 조명이 켜져 있었다. 유리다기에 우려낸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옆 빈 의자에 나는 쭈뼛거리면서 앉았다. 처음에 환영하던 분위기와 달리 사람들은 한동안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20대, 아니 30대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두 명, 20대로 보이는 역시 30대일지도 모르는 젊고 키가 큰 남자가 한 명이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이 계셔서 그분이 도착하면 자기소개도 하고 인사도 나눌게요. 소중한끼 님 무슨 차 좋아하세요? 페퍼민트, 녹차, 히비스커스가 있는데.
모임장이 웰컴차를 준비할 목적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녹차를 마시기로 했다. 가장 무난하기도 하고 나는 녹차의 쌉싸름하고 떫은 듯한 끝맛을 좋아했다. 차를 따르는 팔목에 소주잔크기의 별 문신이 보였다. 그 옆에는 나비와 보라색 꽃 문신이 있었다. 눈이 커서인지 순하게 생긴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모임장의 얼굴로 시선이 갔다. 왼쪽 목에도 장미문신이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몸에는 몇 개의 문신이 더 있을까 생각하면서 녹차를 마셨다. 차향이 좋았다. 부드럽게 쓰고 알맞게 따뜻해서 늦은 11월의 추위가 녹는 듯했다. 여전히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모두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일 텐데 벌써 저렇게 할 말이 많다는 게 놀라웠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모임장이 카톡을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마지막 멤버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집을 둘러봤다. 거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문이 보였다. 문 바로 맞은편에도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화장실과 침실인 것 같았다. 자기가 사는 공간에 모르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차를 마시는 집주인의 대범함을 감탄하는 동안 문이 열렸다. 모임장이 몇 걸음 걸어가서 문을 열면서 인사를 했다.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사를 하는 목소리에 문쪽을 본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다시 숨을 내쉬면서 나도 모르게 눈이 그 사람을 따라갔다. 이 모임에 나온 여자들 모두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 여자는 특별했다. 길고 까만 머리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현관에 비치된 일회용 슬리퍼를 신고 그녀가 거실로 들어섰다. 마침 빈자리가 내 옆이라 그녀는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긴장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샤워를 하고 왔는데도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늦을까 봐 향수뿌리는 것을 깜빡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마치 내 과거와 미래, 현재 속마음까지 알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하얀 피부가 눈부셨다. 눈이 크지는 않지만 속눈썹이 유독 길어서 비밀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예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 처음 이 모임에 간다고 했을 때 차모임을 가장한 소개팅, 부킹의 세련된 버전이라고 했던 진우의 말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마치 나만의 소개팅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오신 것 같으니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모임장 영입니다.
모임장이 모두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모임장의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이어서 자신을 소개했다. 닉네임이 깡쓰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 남자는 닉네임과 다르게 순한 인상이었다. 마치 관리를 받은 듯 매끄러운 깡쓰의 피부를 보면서 남자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큰 키에 깨끗한 피부, 부드러운 인상의 깡쓰에게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지 나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안녕하세요 선샤인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프리랜스로 일하고 있어서 아침에 이런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여자들 중에 마지막으로 선샤인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소중한끼입니다. 저는 재택근무가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그래서 취미를 찾다가 여기 나오게 됐습니다. 이런 모임은 처음인데 나오기 잘한 것 같습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면서 소개를 마쳤다. 하지만 모임에 나오기 잘했다는 말은 백 프로 진심이었다. 선샤인을 만난 것만으로 나는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소개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선샤인이 먼저 인사를 해왔다. 차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달리 목소리는 높고 밝았다. 이 자리가 즐거운 동창모임이라도 된다는 듯 선샤인은 편하게 웃고 어울렸다. 이런 반전 매력까지 바로 내가 원하던 이상형이었다.
인스타에서 아침 차 모임 회원을 모집한다는 말에 나는 충동적으로 신청을 했다. 아침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에서 혼자 마시는 차보다 같이 마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코로나 이후로 재택근무가 많아지면서 나는 아침에 커피와 차를 마시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멀어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낯선 사람들과 만나서 휘발성 수다에 빠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내가 아침 차 모임에 나간다는 말을 진우에게 했을 때 회의시간에 늦었다며 호들갑을 떨던 진우는 그거 소개팅 같은 거야 인마. 가보면 분명 남녀 짝이 얼추 비슷할걸 이라며 내 순수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진우는 어떻게 내가 여기서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 나는 그놈이 돗자리를 깔 때가 됐구나 싶었다. 이 모임의 의도가 무엇이든 나는 선샤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소중한끼는 무슨 의미예요? 소중한 게 한 끼 밥? 아니면 소중하게 생각하는 끼를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인가요?
선샤인이 물었다.
그냥 별 뜻은 없어요. 제가 먹는 걸 좋아해서 생각 없이 지은 거예요.
아.. 재미있네요.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
그냥 맛있는 거 다 좋아합니다. 가리는 게 거의 없어요. 되도록 한 끼라도 거르지 않는 편이구요.
아~ 그래서 소중한끼님이시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선샤인의 눈가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모임장은 웰컴티 외에도 다양한 차를 소개했고, 우리는 모두 차를 음미하면서 마셨다. 다른 멤버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모임이 끝났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보통은 썬샤인이라고 세게 발음하는데 선샤인이라고 부드럽게 지은 그녀의 이름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다행히 모임멤버들은 모두 단톡방에 초대되어 있었다.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따로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번호를 묻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옆자리에 앉은 것이 이유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걸로 봐서 그녀도 내 인상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시간의 모임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늦가을의 냉기는 사라지고 햇살이 제법 따뜻했다. 모두들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차를 가지고 왔다는 깡쓰가 방향이 같은 선샤인과 여자 회원 한 명을 태워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내가 사는 곳을 밝히지 않았다면 우리 집과 반대방향인 깡쓰의 차에 어떻게든 올라탔을 것이다. 맥주도 없이 치킨을 먹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으로 나는 왔던 길을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언제쯤 선샤인에게 톡을 보낼까 고민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무심한 듯 보이기를 바라면서 톡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모임에 다녀오고 며칠 동안 간간히 멤버들은 자신의 일상을 톡에 남겼다. 유독 하늘이 눈부신 날은 하늘을 찍어서 남기고,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있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나처럼 사람들은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 모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 나는 선샤인한테 개인적으로 톡을 보냈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반가워했다. 역시 선샤인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했다. 가벼운 안부를 나누고 다음에 한번 따로 보자는 말을 지나가듯 했다. 그녀도 좋다고 했다. 역시 그린라이트가 맞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본가에는 몇 십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은 부모님이 살고 있다. 딱히 독립할 이유도 없으면서도 직장을 핑계로 독립을 하고 회사 근처에 지금 살고 있는 작은 빌라를 구했다. 이사하는 날부터 거울은 어디에 걸어야 하고, 침대방향은 어디가 좋고 엄마의 지시대로 가구를 배치했다. 물론 나중에 내가 다시 원하는 방향으로 바꾼 것까지는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이사하는 날 외에 일한다는 핑계로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내가 가구위치를 바꾼 걸 알면 엄마는 아마 까무러칠 것이다. 엄마는 집을 풍수에 맞게 꾸며야 다리 뻗고 잠드는 사람이다. 가구 위치부터 화분에 키우는 식물까지 풍수지리에 좋은 것만 고집했다. 엄마 자신만 그렇게 하면 좋은데 나한테도 강요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엄마가 돈 들어온다고 사준 커다란 해바라기 액자만은 현관에 잘 걸어두고 있다. 혹시라도 풍수대로 돈이 많이 벌리면 좋으니까. 내심 반고흐의 해바라기 액자를 걸어둔 것 같은 분위기도 나고 나쁘지 않았다.
우석아 저번에 말한 엄마 친구 딸 한번 만나볼래? 진짜 예쁘고 괜찮은 아가씨래.
엄마는 내가 몇 살인데 선을 보라고 그래? 나는 자만추야.
자만추? 그게 뭔데?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고. 그리고 엄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래?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어떤 아가씬데? 만난 지 얼마나 됐어?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것 같애. 예감이 좋아.
그 아가씨도 너한테 마음 있고?
그런 것 같애.
우석아 그럼 다음에 그 아가씨 생년월일부터 알아봐.
아. 왜 또?
둘이 궁합부터 봐야지. 정들었다가 궁합 안 맞으면 어떡해?
우리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야. 그리고 나는 그런 거 안 믿는다니까 그러네.
안 믿어도 궁합 잘 맞아서 나쁠게 뭐가 있어. 엄마 친구 딸이랑 너는 궁합이 최고래.
에고 박여사님 그만하시고 우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갑시다.
말 돌리지 말고 꼭 생년월일 알아봐. 아님 니가 직접 가볼래? 얼굴 보면 그 아가씨 생년월일 안 봐도 알 텐데.
아무리 용하다고 내 얼굴만 보고 어떻게 알아? 엄마는 그 말을 믿어?
아니야. 선녀님은 달라. 내림굿 한 지 얼마 안 된 애기무당이야. 원래 애기무당이 제일 용한 거야. 내 얼굴 보자마자 니 직업까지 딱 맞췄다니까.
에이 설마? 우연이겠지?
우연이라고 해도 세상 그 많은 직업 중에 니 직업을 한 번에 맞추기가 쉬워?
엄마 그거 쉬워.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고 한국에서 컴퓨터 관련 일하는 사람 은근히 흔해. 엄마도 이제 신들 그만 찾아다니고 그 돈으로 차라리 피부과 다니는 게 어떠실까요?
왜? 나 얼굴 흉하니?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고 결과가 보이는 일에 돈 쓰라는 거지. 그래야 아빠랑 더 오래 사이좋게 살지.
야, 니 아빠는 지금도 내가 연애할 때랑 똑같다고 하는데 뭘.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시간 내봐. 이분은 정말 다르다니까. 이번 한 번만 가주면 다시는 말 안 할게. 진짜 용한 분이야.
엄마는 나한테 좋은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포기를 모르고 말했다. 선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선샤인과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둘러댄 내 입이 문제였다. 대학교 때부터 내가 여자친구만 사귀면 궁합 본다며 생년월일을 물었다. 결혼할 것도 아닌데 무슨 궁합이냐고 했지만 엄마가 안 좋다고 했던 여자와는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는 그때마다 그 점쟁이가 용하다며 감탄했다.
무당이 알긴 뭘 알아 엄마. 이 여자는 딱 내 운명이야. 이번에는 안 물어봐도 그냥 천생연분이라니까.
나는 엄마보다 김칫국을 더 마셔댔다. 아직 따로 만나서 밥 한 끼 안 먹었는데 만리장성을 쌓고 있었다. 그래도 결혼할 때 궁합은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웃음이 나왔다. 싫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궁합이 궁금한 것이 어쩔 수 없이 엄마 아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실없이 웃었다. 갑자기 와서 급하게 만들었다는 밑반찬을 무겁게 들고 집을 나섰다. 현관에 걸려 있는 우리 집보다 큰 해바라기 액자가 나를 배웅했다.
집에 도착해서 반찬을 냉장고에 넣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톡을 보냈다. 밥 한 번 먹자며 언제가 좋은지 물었다. 오늘 저녁은 어떻냐는 선샤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최대한 무심한 말투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말에 나는 단골식당을 예약했다. 저녁까지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식당에 도착해서 선샤인을 기다렸다.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크게 뛰었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그녀가 식당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더 젊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말만 하세요. 제가 먹는 것에 진심이라 맛집을 많이 알아요.
파스타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말했다.
뜨거운 아이스크림이요.
네? 뜨거운 아이스크림이요? 아~ 전에 여행프로에서 본 적 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튀겨먹기도 한다면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뜨거운 아이스크림이요. 아이스크림 튀김은 겉만 뜨겁고 속은 차갑잖아요.
뜨거우면 그건 아이스크림이 아니지 않나요?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먹어본 적도 없는 뜨거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먹어본 적 없으니까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먹고 싶어요. 소중한끼 님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는 편이세요?
그녀의 질문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 믿는다고 해야 그녀가 좋아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뜨거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애요. 제가 먹고 싶거나 믿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인 것 같애요.
소중한끼 님은 왜 먹는 게 좋아요?
음식이 나와서 잠깐 끊겼던 대화가 그녀의 질문으로 다시 이어졌다. 먹는 게 왜 좋냐는 선샤인의 말에는 그녀는 먹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긴 그녀는 좋아한다는 파스타도 면을 세듯 조금씩 먹고 있었다.
먹고 있으면 기분 좋아요. 세상에 맛있는 것도 많고 맛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짜거나 맵거나 먹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잖아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바로 답을 주는 것도 음식이니까요.
그녀는 말없이 내 말을 들었다. 그녀가 말한 뜨거운 아이스크림은 아무리 기다려도 그 맛을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와 나 사이가 더 발전할 거라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말에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했다. 생년월일은 알아냈냐고 닦달을 했지만 이제 겨우 한번 만난 사이에 그런 걸 물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정들기 전에 궁합부터 보자고 난리였다. 생년월일을 알아내기 곤란하면 같이 선녀님을 만나러 가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굳이 상대 여자를 안 봐도 내 얼굴만 봐도 앞으로의 일을 알아내는 용한 선녀님이라고 했다. 점쟁이가 선녀님인지 진짜 선녀님이 점쟁이가 됐는지 모르지만 이름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일 핑계로 이리저리 선녀님과의 만남을 미루긴 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도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한 번만 찾아가면 더는 엄마가 나를 귀찮게 안 할 것 같아서 선녀님 얼굴이나 보러 갈까 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갔다. 궁합을 안 봐도 내 운명일 게 확실하지만 선샤인과의 궁합이 궁금하기도 했다. 예약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하지만 선녀님의 신어머니가 엄마의 오랜 단골집이라 바로 예약을 할 수 있었다고 엄마는 가는 내내 생색을 냈다. 마치 그동안 점집에 쓴 돈이 오늘을 위한 투자라도 된다는 듯이. 점집이라고 해서 큰 나무에 빨간 줄이 걸려 있는 기와집을 생각했는데 고급스러운 아파트였다. 무당은 아파트에 살지 않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선녀님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선녀님이라 높은 곳에 사는지 꼭대기층이었다. 2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맨날 엄마한테 말로만 들었지 처음 와 보는 점집이었다. 안 믿는다고 했지만 살짝 긴장했는지 입이 마르는 것 같았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마치 독립한 딸을 보러 온 엄마 같았다. 까만 정장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선녀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방으로 안내했다. 넓은 거실을 지나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선녀님 하며 무릎을 꿇었다. 분홍색 선녀옷을 입은 예쁜 선녀그림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큰 초가 양쪽으로 켜져 있고 하얀 한복을 입은 선녀님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었다. 나도 엄마 옆에 앉았다.
선녀님 우리 아들이에요. 얼마 전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난 것 같은데 궁합이 어떨지 몰라서 정들기 전에 아들 얼굴이라도 한번 봐주세요. 그 아가씨 하고 어떨까요?
엄마의 말에 선녀님이 부채를 내렸다. 순간 나는 컥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마치 목울대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선샤인이었다. 나를 보고도 선샤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선샤인님이 여기 왜? 혹시 선녀님이 선샤인, 아니 선샤인님이 선녀님?
아파트를 나오는 동안 엄마와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내가 마음에 둔 여자가 선녀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마는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그렇게 모시던 수많은 무당들 중에는 엄마가 아들의 여자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선녀님이 된 선샤인이 낯설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던 것, 나에게는 그녀가 뜨거운 아이스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