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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18. 2024

더 블루 1

더 블루


  거울 앞에 선 세은은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새로 산 임부용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화장대 서랍을 열어 반지를 골라 끼고, 목걸이까지 세트로 맞춰서 했다. 드레스룸 한벽을 채운 명품 가방 중에서 원피스와 어울리는 것을 골랐다. 외출할 때마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세은은 지겹지 않았다. 투명할 만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화장한 듯 긴 속눈썹이 세은의 매력이다. 크고 둥근 눈은 직설적인 표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도 거침없이 하는 세은의 까칠함을 조금 부드럽게 해 줬다. 그런 이유로 세은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벌은 아니지만 쓰고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진 부모덕에 돈 걱정 없이 살았던 세은은 학창 시절에도 진로나 앞날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세은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세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가 끌려서 만난 남편 진영의 집안 역시 돈 걱정하면서 사는 형편이 아니다. 결혼 당시에 집을 시댁에서 마련해 준 것도, 그 집을 세은의 친정에서 살뜰히 채워준 것도 세은은 당연하게 여겼다. 원피스에 어울리는 구찌 가방을 들고 세은은 다시 한번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거실로 나갔다. 


 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아저씨스럽지 않은 몸매의 진영이 가벼운 외출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세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로 나오는 세은을 보자 진영이 얼른 일어나 세은의 손을 잡았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 세은의 배는 그야말로 남산만 했다. 배만 볼록하게 나왔다 싶을 만큼 얼굴도 몸매도 예쁘게 잘 관리한 세은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임신을 하기 전에는 느끼는 못한 감정이었다. 임신 전에도 얼굴로 자신 있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예쁘다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남편도 임신 전보다 자신을 살뜰히 챙겼다. 


 집들이 선물로 케이크를 사기 위해 빵집으로 간 사이 세은은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쐬기로 했다. 세은의 하얀 원피스가 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세은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오늘따라 바람도 불지 않아 친구 미진의 집들이를 위해 집을 나선 세은의 기분이 아주 좋았다. 결혼하고 8년 만에 집을 산 미진은 새집 자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모르면 몰라도 세은 외에도 집들이는 매주 있을 것이다. 시댁에서 해준 아파트에 신혼 초부터 입주한 세은은 알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맞벌이로 아이 키우면서 어렵게 마련한 집이 얼마나 보물 같을지.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세은은 한편으로 그럴 일인가 오버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시댁에 집하나는 받지 그랬냐는 말이 미진의 앞에서 불쑥불쑥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진의 아파트 주차장에 내린 세은과 진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미진의 집이 4층이었다. 숫자로 4층이 아니라 영어로 표시된 F층이었다. 세은은 처음에 미진이 분양받아 입주한 아파트가 4층이라는 말을 듣고 왜 불길하게 하필 4층이냐고 미진을 축하하면서 말했다. 미진은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세은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은 자신도 미신이고 말장난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숫자 4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미리 차량 등록을 해서 출입에 불편함이 없게 해 놓은 미진의 배려가 기분 좋았던 것도 잠시, 역시 4층을 누를 때는 뭔가 찜찜했다. 4층에서 내리니까 넓은 복도가 나왔다. 세은은 복도를 훑어보았다. 쓰레기를 복도에서 바로 버리게 설계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은의 아파트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몇 년 차이에도 아파트는 갈수록 좋은 시설이 많아져서 세은의 아파트가 구식처럼 느껴졌다. 부럽지만 자신의 아파트는 돈 한 푼 안 들어간 시댁 찬스 아파트라는 것을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짧은 부러움을 끝으로 미진의 집 벨을 눌렀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미진이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오느라 힘들었지?”


 “아니. 힘들긴. 집 산 거 축하해.”


 “고마워. 어서 들어와. 들어오세요.”


 “축하드립니다.”


 진영이 어색하게 축하인사를 하면서 케이크를 미진에게 건넸다. 미진은 왜 이런 걸 사 왔냐고 하면서 케이크를 받았다. 집으로 들어가자 미진의 남편이 아들 민우를 안고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민우 많이 컸네요.”


 “네. 벌써 4살이네요. 돌 때 보고 못 뵌 것 같네요. 자주 좀 봐야 하는데 시간이 영 안 나네요.”


 미진의 남편이 진영에게 말했다. 진영은 아빠 품에 안긴 민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미진과 세은은 자주 연락하고 만나지만 진영과 미진의 남편은 따로 왕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만날 때마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친해진 듯할 때 헤어지곤 했다. 식탁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 미진의 남편은 민우를 유아의자에 앉혔다. 뷔페 부럽지 않게 차려진 음식들로 식탁 위는 빈 곳이 없이 채워져 있었다. 원래도 음식솜씨가 있는 미진이 오늘을 위해 힘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 


 “시켜 먹으면 되는데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와 진짜 맛있겠다. 미진아 힘들었지?”


 “많이 한 것도 없는데 뭐. 만삭인 네가 더 힘들지. 일단 앉아 세은아. 진영 씨도 앉으세요.”


 미진이 바로 밥을 떠 세은의 자리에 놓았다. 임산부를 배려한 것이었다. 차례로 진영과 남편,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밥을 놓고 미진이 자리에 앉았다. 음식들은 역시나 맛이 있었다. 미진의 남편은 민우의 밥을 챙기면서 밥을 먹었다. 미진은 잘 팔리는 잡채나 갈비찜의 빈 그릇을 챙기면서도 여유있게 세은 부부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가 소고기뭇국에 말아준 밥을 잘 받아먹던 민우가 갑자기 보채기 시작했다. 진영이 민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비행기 소리를 내면서 밥을 먹여주자 민우가 몇 번을 더 먹었다. 그러나 금방 싫증을 내고 다시 짜증이었다. 그러자 미진의 남편이 태블릿을 민우의 식탁 위에 놓았다. 


 “어릴 때 영상 많이 보면 안 좋은데. 민우 유튜브 많이 보여줘?”


 세은이 샐러드를 먹으면서 말했다. 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민우를 보면서 대답했다. 


 “응. 많이는 안 봐도 가끔 보여줘. 어차피 크면 볼 건데 뭐. 우리 밥이라도 편하게 먹으려면 유튜브가 일 좀 해 줘야지. 연어 좀 더 먹을래?”


 “그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미디어에 노출하는 거 아니야? 부모가 조금 귀찮아도 신경 써야 돼.”


 세은의 말에 미진의 남편이 민우에게서 세은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진이 접시에 담아 온 연어를 받느라 세은은 미진의 남편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진영과 미진 남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부딪혔다.


 “그런데 너희 동네 조금 외곽이라 불편하겠다. 아까 오는 길에 보니까 외국인들도 많던데 안 무서워?”


 “무섭긴. 요새는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놀랍지도 않잖아. 차로 다니니까 불편한 것도 없고 오히려 조용해서 좋아.”


 “외국인도 외국인 나름이지. 여기는 동남아 사람들이 많던데. 나는 걷다가 길에서 마주치면 무섭더라. 멀리서 보이면 일부러 돌아가는 편이야. 너도 조심해.”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 아니야. 남의 나라에 와서 오히려 더 조심하는 것도 같고. 네가 겁이 많아서 그런 거지 괜찮아.”


 “뭐, 그럼 됐고. 아 나도 와인 한잔하고 싶다.”


 “그지? 너 와인 좋아하는데 앞으로 모유수유까지 하려면 일 년은 더 참아야 할 텐데.”


 “일 년? 미친다 진짜?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커피라도 마셔야겠어. 미진아 나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주라.”


 세은은 일어나 거실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많이 안 먹은 것 같은데도 배가 불러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미진이 갖고 온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나니 소화도 되는 것 같고 기분도 나아졌다. 임신한 후로 좋아하던 커피를 자제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와인 대신 커피라도 마셔야 했다.


 진영과 미진의 남편이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집 구경을 마친 세은은 오래 나와 있어서 뻐근한 허리 탓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차에 타자 세은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누웠다. 몸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얼른 출산을 해서 몸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들은 출산하면 더 힘들다고 하지만 세은은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지금처럼 눈에 안 보이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자기야. 미진이네 좋더라. 그지?”


 “새집이라 그런지 좋아 보이더라. 그래도 앞으로 갚을 대출이자 생각하면 막막하겠어.”


 “그니까. 그게 무슨 자기 집이야? 은행집이지. 근데 미진이는 애를 조금 신경 안 쓰고 키우는 것 같애. 벌써 미디어에 그렇게 노출시키면 안 좋다니까. 걔는 너무 무던해서 탈이야.”


 “뭐 나름의 육아방식이 있으니까. 키우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고. 그나저나 민우 보니까 앞으로 우리가 걱정이야. 밥 한번 마음 편히 먹기도 힘들 텐데.”


 “난 걱정 안 해. 잘 해낼 자신 있어. 부모가 잘하면 아이는 잘 자라게 돼 있으니까.”


 진영은 세은을 사랑을 담은 눈으로 보았다. 세은의 말대로 육아가 쉽게만 되지 않겠지만 세은이라면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은은 뭐든 긍정적으로 보고 에너지가 좋은 사람이었다. 분명 아이도 밝고 건강하게 잘 키울 것 같았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다 싶더니 비가 쏟아졌다. 세은은 소파에 누워서 블루베리를 먹으면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예정일이 내일이라 조심하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진영은 진통이 오면 바로 전화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나갔다. 얼른 진통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세은은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코믹영화나 예능을 보면서 딴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요구르트를 가지러 부엌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던 세은은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몸을 관통하는 가늘고 예리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자 다시 몸을 움직이던 세은은 이번에는 정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발을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다리에서 양수가 흘러내렸다. 진통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양수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세은은 정신을 차리고 진영에게 전화를 했다. 양수가 터졌다는 말에 진영은 바로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세은은 스마트폰으로 양수가 터졌을 때 요령을 찾아봤다. 미리 준비해 둔 아기 기저귀를 하자 더 이상 양수가 다리로 흐르지 않았다. 여전히 진통은 없었다. 삼십 분 만에 진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미리 준비해 둔 가방을 챙겨 들고 세은을 부축해서 차에 태웠다. 차로 십분 거리의 병원으로 가는 길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진통이 오지 않은 세은에게 의사는 유도분만을 위해 촉진제를 주사했다. 진통으로 힘들어하는 세은의 손을 잡고 진영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세은은 평소 자신했던 것처럼 씩씩하게 여섯 시간 만에 딸을 낳았다. 임신 기간 중에 딸이라는 것을 알고 진영도 세은도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세은은 딸이 성인이 되어도 언니처럼 멋지게 나이 들어서 친구 같은 엄마로 살고 싶어 했다. 분만을 하고 지친 표정으로 누워있는 세은에게 의사가 딸을 안겨주었다. 행복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딸을 보던 세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탯줄을 자르는 감격스러운 순간에 젖어 있던 진영이 딸을 보기 위해 세은의 옆으로 다가갔다. 세은의 표정을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딸을 본 진영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사만이 딸의 출산시간을 통보하고 회음부를 봉합하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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