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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13. 2021

명절이 사라졌다.

시골에서는 설날 전날에는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밤새 불을 켜 두었다. 설 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했다. 어릴 때 설날은 거의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동네가 분주했다. 일주일 전부터 설을 준비하느라 아주머니들은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품앗이를 했다. 삭힌 찹쌀을 익히고 반죽하고 바탕을 만들어 두면, 튀기고 조청을 바르고 튀밥 옷을 입히는 것은 아주머니 몇 분이 함께 했다. 갓 만든 유과를 먹으면서도 만드는 과정의 고달픔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방에 널어놓은 찹쌀 바탕을 뒤집는 모습을 본 기억만으로 손이 많이 가는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두부를 만들 때도 품앗이로 했다. 두부도 참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만들어 놓으면 마트에서 사 먹는 두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맛이다. 겨울에 추운 방에 두부를 물에 담가 두면 물에 살얼음이 살짝 생기곤 했다. 그렇게 차가운 두부를 설날 아침에 떡국에 넣기도 하고 크게 잘라서 김치를 얹어 먹기도 했다.


방앗간에서 빼온 가랫 떡은 딱딱하게 굳으면 떡국떡 크기로 썰어야 하는데 손목이 나갈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초등학생인 나도 엄마 옆에서 몇 번 칼질을 해 보고는 포기하곤 했다. 나는 떡국떡을 썰만큼 딱딱한 가래떡을 좋아한다. 갓 나온 따끈한 가래떡을 조청이나 꿀에 찍어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정도 추운 방에 굳혀서 먹는 것을 좋아해서 지금도 떡을 사 오면 일부터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곤 한다. 그러면 남편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곤 한다. 아마 설날 떡국떡을 쓰는 엄마 옆에서 집어먹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뭐든 왜 그렇게 많이 했는지 뭐든 시작하면 하루를 꼬박 한 가지 요리에 써야 했다.


그렇게 엄마가 시간과 정성을 쏟아 준비한 설날은 풍성했다. 살얼음 같은 우리 집에도 잠시 온기가 돌았다. 세배를 하러 오거나 인사를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면서 마신 술에 취하면 아빠는 금세 무서워질 테지만 설날 아침은 우리 집도 분주하고 풍성하고 어린 우리는 세배를 했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세뱃돈을 준 적이 없었다. 아니 할머니는 세배에 웃음 한조각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저 어렸다. 어른들의 얼굴을 읽을 생각도 없이 어렸다.


어느 해 섣달그믐이었다. 내가 11살이나 12살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서른여 가구가 사는 우리 동네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자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일어났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정신을 빼앗겼다. 우리가 잠든 동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다. 분명 자기 전까지는 눈이 안 왔는데 몇 시간 만에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마을을 밝히는 불빛과 하얀 눈빛으로 마치 대낮 같았다. 나는 세 살 아래 남동생을 깨웠다. 동생도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 놀라고 좋아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우리는 걸었다. 불빛 아래 눈을 뿌리며 놀았다. 눈사람도 만들고 눈 쌓인 나무를 흔들어서 눈을 맞았다.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황홀했다. 발목까지 내린 눈이 이불 같아서 누워서 눈을 감아봤다. 아직 내리고 있는 눈이 소리를 냈다. 샤락 샤락.


가끔 그날의 내가 생각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던 그 날을 남동생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남동생과 나의 겨울왕국이었던 그날의 우리 동네가 가끔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도저히 그렇게 걱정 없이 뛰어놀던 내가 익숙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올해 설에 우리는 집에서 보내고 있다. 추석에도 설에도 어른들을 찾아가지 못한 것이 남편은 죄송한지 전화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평소와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는 명절이 그냥 평소와 똑같은 하루다. 아마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른들은 올해가 많이 허전하고 쓸쓸하겠지만.


우리의 명절은 어디로 갔을까?

어린 시절 나와 동생을 깨우던 그 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며칠째 우리 세 식구는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간단하게 먹으면서 설을 난다.

시골에서는 명절마다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음식이 있었다. 그 음식들도 사라진 오늘, 어디선가 봄기운이 오고 있었다. 이제 산책을 해도 귀가 시리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계절이 사라졌다. 집콕이 길어지면서 나의 몸에서 에너지는 사라지고 머릿속에 안개는 짙어졌다. 자꾸 뭔가를 빼앗기는 기분이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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