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려는지 사방이 푸른빛이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 미순과 태오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두 사람이 팔을 벌려 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느티나무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주 선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슬픈 두 사람의 눈빛은 부딪힌 자리에서 허무하게 부서진다. 태오가 손을 들어 미순의 볼을 만진다. 미순은 움직이지 않고 태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떠오를 것이다. 마을이 깨어나려고 한다. 미순은 태오가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돌아오면 바로 혼인을 하자고 태오가 말한다면 미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겠다고 다짐한다. 태오는 그럴 염치가 없어서 그저 미순의 부드러운 볼에 얹은 손을 내린다. 망설이던 태오는 결심한 듯 입을 연다.
-미순아 나 기다려라.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니 돌아오면 우리 혼인하자.
미순은 태오의 말이 잡히지 않을 구름 같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태오가 얼마나 힘겹게 말을 꺼내는지 알 것 같아서다. 동이 트면 태오는 길을 떠나기로 돼있었다. 태오는 돈만 벌어오면 미순과 혼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년 봄에 미순의 집으로 소고기를 끊어 가서 혼인시켜 달라며 태오는 미순의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미순이 태오와 마음을 나눈 것을 꿈에도 몰랐던 미순의 아버지는 작은 눈이 놀라서 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 눈에 멸시와 혐오가 번졌다.
-감히 니깟놈이 감히 니깟게
미순 아버지는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몇 마지기 안 되는 논이지만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살림이었다. 남에게 원한 살일 없이 사람 좋은 미순 아버지는 그래서 천한 백정 놈이 미순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치가 떨린다. 그 분노가 사람 좋은 미순아버지였기 때문에 매질 없이 끝났을 것이다. 다름 사람이었다면 태오는 숨이 끊어지게 매질을 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매질이라면 오히려 설득이 쉬웠을까? 미순아버지의 완고함은 매질보다 독했다. 그날 이후로 미순을 마을에서 우연히라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어쩌다 미순이 집을 나설 때도 엄마와 함께였다. 태오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순과 혼인하겠다고. 일본에 가면 백정도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장 씨의 말에 태오는 두말없이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백정은 굶는 일이 없다. 그래도 넉넉하지 않다. 고기를 가져가서 돈을 안 줘도 따지지 못하니 파는 것에 비해 남는 것은 넉넉하지 못하다. 돈을 벌어서 큰 집을 사고 다시 미순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이 문제라면 미순아버지의 입이 벌어질 만큼 돈으로 미순을 데리고 올 것이다. 일본은 망하지 않을 것이고 마을 사람 누구도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다. 돈이 곧 신분이다. 태오는 돈으로 신분을 바꾸고 미순을 달라고 말할 생각이다. 미순과 헤어지는 것이 힘들지만 미순을 백정의 아내로 만들지 않기 위해 태오는 잠깐 떨어져 있기로 했다. 지금까지 손조차 허락하지 않던 미순이 태오의 손을 꼭 잡고 있다. 태오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미순의 마음이 태오의 손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이 밝아오는 해를 머금었다. 태오는 결심한 듯 미순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재촉하듯 태오는 당산아래 마을을 내리 달렸다. 미순은 멀어지는 태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볼을 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밝아오는 아침햇살이 미순의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미순은 언제까지나 태오가 오기만을 기다리겠다고 당산나무를 걸고 다짐했다.
태오가 떠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이 없었다. 마을에는 태오처럼 돈을 벌겠다며 젊은 남자들이 어딘가로 떠났다. 장 씨는 일본에만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젊은 남자들을 꼬드겼다. 장 씨가 일본앞잡이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협박을 했다. 남은 가족이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학도병인줄 알면서도 장 씨의 말에 넘어간 이도 많았다. 장 씨의 행색이 나날이 좋아졌다. 일본 순사들과 어울리면서 마을에서는 장 씨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긴 겨울이 지나 매화가 꽃을 피웠다. 양지에는 쑥이며 냉이가 올라왔다. 동무와 나물을 캐고 집으로 가던 미순 앞에 장 씨가 멈춰 섰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순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기를 위아래 훑어보는 장 씨의 눈이 기분 나쁘게 빛나는 것을 느낀 미순은 몸에 뱀이라도 지나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장 씨 옆을 지나가는 동안 그의 눈은 미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을 한가운데 미순의 집이 있었다. 마을은 평지에서 언덕을 이루며 집들이 당산나무까지 이어져 있었다. 당산에서 보면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당산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마을을 보고 있던 미순아버지의 눈에 장 씨와 미순이 보였다. 께름칙한 기분에 담배를 끄고 집으로 내려왔다. 장 씨의 눈이 자신의 딸 미순을 보는 것만으로 불쾌했다. 미순을 보던 미순아버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을에서는 장 씨가 처녀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돈지 오래였다. 처녀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지만 한번 떠난 그녀들의 소식을 들은 이는 아직 없었다. 장 씨의 꼬임에 속아서 제 발로 가는 처녀도 있었지만 싫다는 이를 협박하고 한밤중에 얼굴을 가리고 끌고 갔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미순아버지의 눈에 아직 아기 같은 미순이 어느새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날밤 저녁을 물리고 미순아버지와 아내가 어둑한 촛불 아래서 낮게 두런거렸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이틀 뒤 물 한잔을 사이에 두고 미순의 혼례를 치렀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마을에서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날로 미순은 신랑의 집으로 들어갔다. 댕기머리에 미순엄마가 쓰던 옥비녀를 쪽진 미순은 어린 색시티가 났다. 아버지의 강압과 설득에 혼례를 한 날밤 미순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쪽진 머리가 어색하고 낯선 방에 함께 있는 사람이 무서웠다. 마을에서 오고 가면서 얼굴을 알고 지낸 사람이지만 단 둘이 말한마디 해본 적이 없었다. 미순과 한방에 앉은, 오늘 갑자기 신랑이 된 영길은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미순보다 열다섯은 더 먹은 그는 올해 서른이 되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십 년 가까이 떠나 있던 그가 마을 초입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은 삼 년 전의 일이다. 만석지기는 아니라고 해도 마을에서는 꽤 넉넉했던 집에서 태어난 영길은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니 유학공부하고 돌아오면 나랏일을 하게 되리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영길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심성이 바른 아이였다. 있는 집 자식답지 않게 예의 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뭐라도 챙겼다. 아무도 영길과 그의 집에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 역시도 마을에 인심을 잃지 않을 만큼은 베풀면서 살았다. 누구나 영길의 유학길을 축하했고, 그가 돌아왔을 때 환영했다. 떠날 때보다 유난히 마른 몸으로 돌아온 영길을 보고 사람들은 공부가 힘들어서라고 여겼다. 삼 년이 지나도록 영길의 몸에는 살이 오르지 않았다. 나랏일을 하겠다며 나서지도 않았다. 젊잖게 차려입고 나이에 맞지 않게 지팡이를 짚고 하루 한번 산책을 하는 것이 영길의 하루 일과였다. 그러고도 얼굴빛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갔다. 영길의 엄마는 일본에서 무슨 일로 잡혀가서 옥살이를 했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옥살이를 하면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영길은 속에 골병이 들었다고 했다. 먹는 것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고 했다. 입맛을 잃기도 했지만 몇 수저 먹은 것마저 소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했다. 먹은 것을 토하기 일쑤이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속시원히 답을 해주지 않아 부모는 냉가슴을 앓았다. 영길은 공부한 것으로 벼슬은커녕 마당에 비질만 해도 식은땀을 흘렸다. 그나마 경사가 있는 마을을 산책하는 일이 영길이 온 힘을 다해 해 내는 최선이었다. 마을에 젊은 남자가 씨가 마르지 않았다면 미순이 영길에게 시집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 씨가 미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것뿐인데 유난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는 미순의 부모는 하루도 발 뻗고 잘 수 없었다. 다음날로 영길의 집으로 미순엄마가 찾아가 사정을 해서 치뤄진 혼례였다. 아들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영길모는 혼례를 하는 것이 도리어 미순에게 죄스러웠지만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를 곳으로 붙들려 갈 목숨 하나 살리는 심정이었다. 한방에서 영길도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젊은 여자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한 적은 있지만 단둘이 한 방에 있어본 것은 영길로서도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미순은 아직 피지 못한 봉오리 같았다. 미순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영길은 미순의 머리에 쪽을 벗기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겼다. 그대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영길로서도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미순이 활옷을 벗고 편하게 잠들 수 있게 잠든 척 눈을 감았다. 미순은 밤이 새도록 울고 울었다. 태오를 기다리겠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해 울었다. 갑작스럽게 팔려온 것처럼 영길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 서러워서 울었다. 마른나무 같은 영길이 도깨비 같아서 울었다. 어딘가로 떠난 처녀들에 대해 들었던 무서운 소문 때문에 울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도 미순은 잠들지 못했다. 허기와 피로 때문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미순은 낯선 부엌으로 갔다. 이미 시어머니가 쌀을 씻고 있었다. 미순을 본 시어머니가 미순의 손을 두 손을 감싸 잡았다. 허기진 미순의 마음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것 같았다. 미순의 어깨를 토닥이던 시어머니가 말했다.
-아가 기운 없는데 들어가 더 자거라. 얼마나 낯이 설고 피곤할지 아니까 더 자도 된다.
-아니에요.
미순은 겨우 그 말만 하고 씻던 쌀바가지를 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항상 혼자였던 부엌에 들어온 미순의 온기에 시어머니의 마음에도 봄볕이 든 것 같았다. 안방에 차려진 두 개의 밥상에 네 식구가 앉았다. 영길과 시아버지가 한 상에, 미순과 시어머니가 한상에 마주 앉았다. 조용한 성격의 시아버지가 미순을 다정하게 보았다. 아들의 마른 몸을 보면서 마음 한쪽이 뻐근했다. 평생 혼자 살다가 이른 나이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생에 며느리는 없을 줄 알았는데 금방 필 것 같은 꽃 같은 며느리와 밥을 먹는 순간이 꿈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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