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없이 짝퉁 시가를 구매할 상황에 처한 나는 까를로스에게 혹시 같이 내려가서 안 사겠다고 설명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까를로스는 자기가 내려가서 말을 하면 혹시나 자기 탓을 할 수 있으니 그건 어렵겠다고, 일단은 내려가서 돈이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무섭기는 했지만 여기 계속 사실 분들인데 청년의 원망을 사기라도 하면 곤란하겠구나 싶어, 일단은 무조건 돈을 바라데로에 놓고 왔다고 잡아떼야겠다 마음을 먹고 아래로 내려갔다. 일리아나는 내 어깨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빠르게 빼 자기한테 맡기라고 했다. 혹시라도 판매에 실패한 청년이 카메라라도 달라고 조를까 걱정되어서였다.
일단 내려가 나는 일행에게 한국어로 ‘이 시가 짝퉁이래. 우리 사지 말자. 돈 없다고 잡아떼자.’라고 설명을 했다. 나는 되게 차분하게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일행에게 물어보니 내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 다 보였다더라. 청년한테는 ‘우리가 돈을 전부 바라데로에 놓고 와서, 지금 줄 수 있는 현금이 없다. 시가는 안 사겠다.’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
그랬더니 청년의 눈이 커지며, ‘사겠다고 해놓고 사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미 스티커를 붙였지 않느냐’라고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돈이 없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위에서는 까를로스가 지켜보고 있었고, 주위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전부 앉아 있었기에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청년은 화가 나 있었다. 일단은 상황을 빠르게 무마하고 싶어 쿠바 페소로 600쿱을 주고, 돈이 없고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청년은 한숨을 쉬더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남은 400쿱을 달라고 했고, 그래 봤자 1000쿱이면 2만 원도 되지 않기에 그냥 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더 이상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고,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보여서 무슨 일이라고 일어날까 무서웠다. 청년은 돈을 받고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손짓을 하고 휙 우리를 지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내가 겪은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눈에 들어오고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 하바나에서 길을 찾아 준 남자는, 주소를 몰라 일단 와이파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친절을 베풀어, 옆 남자에게 휴대폰을 빌리고 직접 까사에 전화해 주소를 묻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당연히 사례를 조금 했는데, 원래는 이렇게 돈을 버는 사람인가 싶었다가 나중에 생각하니 이 사람도 시가 판매원이었던 것 같다. 오늘만 시가 반값이라고 하는 건 하반에서 자주 사용되는 사기 수법이었고 말이다. 보통은 한 명은 집 안에서 시가 판매원 역할을 하고, 한 명은 길을 돌아다니며 관광객을 낚아 집 앞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판매에 성공하면, 삐끼 역할을 하는 사람은 시가 판매원에게 돈을 받는 구조다. 이런 사기를 치는 사람이 곳곳에 있고 다들 비슷하기에, 우리에게 말했던 ‘시가 반값 데이’ 멘트 또한 겹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판매 가능한 시간이 20분 남았다는 남자의 말도, 스티커를 붙이면 팔지 못한다는 엄포도, 사지 않겠다고 했을 때 화가 났던 남자의 표정도 이해가 갔다. 관광객 한 명 낚아, 쿠바 사람들의 일 년 월급만 한 떼돈을 벌 수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놓친 것이니 말이다. 또 남자와 우리가 집으로 걸어갈 때, 남자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막 환호하면서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이것도 이해가 갔다. 우리를 보자마자 ‘하바나에 언제 왔는지’를 물었던 것도. 하바나에 딱 도착한 사람들이어야 ‘하바나에서는 딱 오늘만 반값에 판매한다’는 전략에 속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써버린 1000쿱은 아깝기는 했지만, 짝퉁 시가를 12만 원이나 주고 사는 것보다야 나았다. 2만 원 내고 호된 하바나 사기 수법을 배웠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는 이런 사기에 절대 안 속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하바나에 오기 전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이 안에 들어와 보면 다르다. 너무 낯선 하바나에서, 사람들은 오늘이 자꾸 저렴한 시가 판매일이라고 말을 하고, 이 여러 사람들의 말은 전부 일치하는 데다가 시가 박스도 스티커도 내가 본 정품이랑 동일하고, 시가 자체도 멀쩡해 보였기에 정말 깜빡하면 큰돈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하바나는 분위기가 안 좋다.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19의 여파로 관광객이 뚝 끊기면서 경제 상황은 거의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각종 사기들이 판을 친다. 사기 치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니 나 같은 초짜 관광객은 무엇이 사기고 호의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바나를 여행한다면, 낯선 현지인은 일단 무조건 경계하고 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