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조혜원
군산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 시간이 멈춘다. 꼭 도시 곳곳에 옛 건축물들이 있어서는 아니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커다란 고요가 도시 전체에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저 조용히, 오랫동안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잔잔히 걷기만 해도 좋은 곳.
군산은 걸어서도 충분히 둘러볼 만한 곳이다. 철길마을만 조금 떨어져 있고 신흥동 일본식 가옥, 초원 사진관, 고우당, 이성당, 구 군산세관 등 대부분의 볼거리들은 반경 20분 거리 안에 모여있다. 자전거로 돌아보면 딱 좋은 코스지만 관광객에게 자전거를 빌려주는 시설을 찾기 힘들다. 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철로를 따라 철길마을이 이어진다. 철길마을엔 삶이 철로에 한걸음 더 다가와 앉은 일상이 철로를 가로지른다. 철길 위로 빨래가 널리고, 고추가 가을볕에 마르고, 대야에 흙을퍼 담아한 가족의 먹거리를 키워낸다. 일상의 앞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철로 끝 쉼터에도 주민들이 모여 관광객을 구경하고 있다. 철로 끝쉼터에도 주민들이 모여 관광객을 구경하고 있다. 커다란 군산 지도 안내판의 뒷면은 마을 게시판이다. 간격을 유지하며 나란히 뻗은 철로처럼, 일상과 여행이 공존하는 터전이다.
군산은 쌀과 연관이 깊다. 호남평야의 쌀 집산지이자 출입구기 때문에 예부터 왜적의 침입이 많았다. 군산항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쌀을 가져가고 일본 공업 제품을 유입하는 이중 수탈의 창구로 개항했다.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과는 달리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그 아픔을 문학으로 꾹꾹 써내려 간 작품이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이다. 쌀을 가져가기 위해 항을 만들고 그렇게 착취한 이윤으로 일본식 2층 가옥을 짓고 마당에는 떡하니 수영장 까지 만들어 여흥을 즐겼다. 쳐다보기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 그 흔적들은,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그대로 보존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으니까. 콕 집어 이름 붙여진 장소 이외에도 일본 건축 양식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들이 골목골목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만났더라면 참 일본스럽고 아름다운 집이라고 생각했을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 들어선다. 입구는 크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규모가 꽤 크다. 군산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이라 히로쓰 가옥이라고도 불린다. 근세 일본 무가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는 ㄱ자 형태의 2층 목조 주택은 마치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어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범죄와의 전쟁’, ‘가비’ 등의 촬영지로도 쓰였다. 잘 꾸며져 있는 정원을 거닐다 보면 가슴 언저리가 묵직해진다. 단정한 기와 한 장, 대나무를 엮어 만든 소박한 창살 하나에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을 테니까.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신사가 군산에 있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들린다. 우리나라의 사찰과 달리 단청 장식 없고 정갈한 느낌의 동국 사는 일본 조동중에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해방을 맞이하며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사찰 뒤편에는 굵고 건강한 대나무가 두르고 있어 고즈넉하다. 동국사의 앞마당에는 일본 조동종의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참사문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들도 우리도 반성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를 세기고 동국사를 나선다.
길은 어느 순간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서 1980년대 영화 속으로 흐른다. 군산은 많은 것들을 잘 보존하고 유지시킨다.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였던 초원사진관은 영화 촬영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 의해 복원됐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타던 스쿠터와 그 보다 조금 큰 추억의 티코도 전시되어있다. 영화 속에서 심은하가 문틈으로 편지를 끼워 넣었던 흔적 같은 세세한 디테일들까지 구석구석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 속 한석규는 본인의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우고 필름을 장전한다. 현실 속 연인들은 기다란 봉에 휴대전화를 매달아 재빠르게 추억을 담아간다.
문화유산골목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맛 집 들이 등장한다. 빈해원의 물짜장, 이성당의 야채빵, 돌돌 말아먹는 중동호떡, 공설시장의 매운 잡채 까지. 사람 사는 와글와글함을 느끼고 싶다면 시장으로 가자. 야채와 떡집이 많은 구역전 종합시장, 깔끔하게 신식 건물로 들어간 공설시장, 말린 생선들이 줄을 선 신영시장은 머리와 꼬리를 맞대고 있다. 떡 하나 입에 물고 공설시장에선 매운 잡채와 군것질도 하며 바람에 꾸덕꾸덕 말린 생선까지 한 보따리 손에 쥐면 시장 구경이 끝난다. 조금 떨어진 명신시장 앞 허름한 뚱보식당에서 이 정도는 돼야 상다리가 부러질 걱정을 하겠구나 싶은 백반을 먹는다. 메뉴판 도다로 없이 인원에 맞춰 상이 차려진다. 많이 먹고 밥은 더 퍼다 먹으라는 할머니의 구수한 정을 밥알과 함께 꾹꾹 씹어 삼킨다. 소주와 함께 백반을 먹는 배 타는 아저씨와 반찬들을 카메라로 찍으며 음식에 경의를 표하는 여행자가 한데 섞인다.
터미널로 돌아가는 길골목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의 간판은 나른하게 낮잠을 주무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닮았다. 도시의 새로 생긴 간판들이야 단정하게 새 옷을 차려입겠지만 이곳의 간판들은 할머니의 주름처럼 시간의 흔적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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