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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an 30. 2024

초여름 숲 산딸나무

산딸나무






























내가 다니던 학교 도서관 샛길에는 높다란 나무들이 심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어느 날엔 그 길로 등교를 하다가 희고 아름다운 꽃잎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른 고개를 들어 이 청아한 꽃의 근원지를 찾아보았지만 초록 잎사귀들만 가득할 뿐 꽃잎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더욱 신비로웠다. 그러다 며칠 후 과방에서 과제를 하던 중 잠깐 2층 외부 광장에 들렀다가 마주한 광경에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바람을 쐰다고 광장 펜스 쪽으로 다가갔더니 그때 봤던 꽃들이 무리를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서는 꼭 빛이 나는 것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광장 펜스 바로 아래가 도서관 사잇길이었는데, 특이하게 꽃들이 나무의 윗면에서만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2층 외부 광장에서도 펜스에 가까이 가지 않고서야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4학년이 될 때까지 이런 장면을 놓치고 살았다니!
















떨어진 꽃잎을 주워들고 부리나케 과방으로 돌아와 에피소드를 풀며 친구들에게 꽃의 미모를 연신 자랑했다. 청순하고 우아한 색감, 부드러운 선으로 그어진 세련된 실루엣, 가운데 달린 완두콩같이 동그란 포인트로 귀여움까지 갖추었다. 이름도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담이 편지로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 꽃나무의 이름은 산딸나무야. 열매가 딸기랑 비슷해서 산의 딸기나무라는 의미래. 내 블로그 글들에 나 힘들어요 하는 게 묻어있는 걸 보고 담이 써준 편지였다. 담은 내가 늘 붙어있진 않아도 멀리 있진 않은 섬 같은 존재라고 해주었는데, 당시의 나는 섬 같은 아이라기보다는 섬에 사는 아이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곤 했다. 반경 범위가 아주 좁은 땅에서 정해진 일을 반복하며 하염없이 바다 너머를 그리워하는 섬 아이. 코로나 기간으로 등교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했기 때문에, 나는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밤과 낮이 뒤바뀐 채로, 혼자서 좁은 방 안에서 과제만 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조그만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효창공원 콘크리트 길 귀퉁이에 스며든 연둣빛 이끼, 보도블럭 틈새를 비집고 나온 잎, 파마산 가루가 흩뿌려진 것 같은 도로가의 이팝나무, 구석진 곳에 제 마음대로 핀 들풀과 나팔꽃, 민들레, 자주 가는 카페 화단의 꽃 무더기. 그런 것들을 눈에 꼭꼭 담느라 등교하는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그중에서도 도서관 사잇길을 지나 계단을 올라야지만 만날 수 있는 산딸나무꽃의 깨끗한 아름다움은 찰나의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사실 산딸나무의 꽃은 가운데의 동그란 부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희고 우아한 부분은 꽃잎이 아니라 꽃차례를 감싸는 포이다. 꽃 수십 송이가 모여 조금 더 큰 공 모양을 만들었음에도 한 송이 한 송이의 크기가 워낙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고, 곤충들을 유혹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포를 크고 아름답게 변신시켜 꽃잎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산딸나무꽃은 존재감이 미미한 본인을 보완해 줄 수 있도록 주변의 것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변화시켰고, 결국은 곤충들과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에 성공하였다. 원래가 부드럽고 청순한 얼굴인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영리하고 치열하게 탈바꿈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나니 더 경이로울 수밖에.




나는 졸업을 하고 나서도 학교 근처에서 2년을 넘게 살았고, 5월 끝자락이면 슬슬 산딸나무에 꽃이 피었을까 확인하러 광장에 들렀다. 산딸나무꽃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버거웠던 그때가 생각나고 서로를 챙기던 그때의 친구들이 생각나고, 한 템포 멈추고 후 숨을 고를 수 있다. 해의 반이 이만큼 지나갔구나, 작열하는 여름이 곧이겠구나. 5월 말에서 6월 상순, 이팝나무꽃이 지고 나면 산딸나무가 순백의 꽃을 피운다. 사조화(四照花)라고 부르기도 할 만큼 꽃이 피면 사방이 환하다. 가로로 층층이 포개어지는 것이 무리 지은 새 떼가 날개를 펴고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 이사한 집은 다 좋은데 내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산딸나무가 근처에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대신 우연한 만남엔 기다리는 나에게 더 큰 기쁨을 가져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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