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감상진
죽은 자가 산자를 돕는다. 그렇다면 산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는 없을까?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그렇다면 현재도 과거를 도울 수 있을터.
상진이형을 만나고 왔습니다.
서울 신윤태(74학번) 선배와 평택이 집인 권오섭(74)선배는 김포에서 내려오는 장영철PD차로 내려오고 나는 김제에서 출발했습니다. 고창에서 최철(67학번)선배와 광양에서 이충교(74)가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담양사는 오구균(73)선배가 호스트로 모든 여정을 감당했습니다. 7명의 ‘현재(現在)’가 모였을 때 상진이형이 밝은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까페 ‘행성리여행’ 2층 특별실에서 상진이형은 써클 한얼멤버들의 공동 자취방이자 학습교양공간 1975년 ‘푸른여관(수원시 서둔동/ ㅁ자형으로 이전여관 했던 방들을 자취하숙방)’을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푸른여관 한얼팀 살림을 맡았던 총무 신윤태와 자신과 2인 1조 같은 방을 썼던 권오섭을 통해서 후욱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1975년 4월 11일의 할복 의거가 그냥 갑자기 실행된 일이 아니라 ‘스물여섯의 옹골진 삶’ 전체가 담긴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새삼스러워 했습니다. 전날밤(4월 10일), 후배 권오섭에게 읽어보라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드리는 공개장’을 건네주고 ‘아 명문장 이네요’ 감동하던 룸메이트의 모습을 보고 밤새 뒤척이던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할 때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리를 다쳐 기브스하고 있다 막 푼 권오섭을 부축동행하여 대강당옆 계단에 데려다 놓고..... 잔디밭 집회현장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다 본....
1년 선배 최철선배는 눈앞에 보듯 68년도 입학한 김상진을 또렷이 기억하고 한얼 68년 여름수련회 사진두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뒷줄 우측에서 다섯번째, 대학 신입생 김상진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입니다. 나는 사진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상진 형을 돌려세워 ‘형님’...........깊은 포옹을 했습니다. “누구신지?” 형은 늙수레한 60대 중반의 저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형님, 찬찬히 두고두고 말씀 드릴께요”
인터뷰를 시작했고 선배들 한분 한분 상진형을 소환하고 만났고 그리워했습니다. 선배들의 일관된 삶결에서 상진형이 남은 자들을 돕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오구균 선배는 한얼의 인장, 회의자료, 메모노트등 중요한 자료와 기억을 가져왔습니다. 다섯 분은 일어나서 ‘한얼가’를 멋지게 불렀습니다. 아, 아닙니다. 최철선배 옆에 상진이 형도 같이 있군요. 여섯이 불렀습니다.
자유의 젊은 날개야 젊은날개야
조국의 푸른 하늘로 푸른 바다로
우람찬 뜻을 안고서 뜻을 안고서
다같이 높이 날으자 높이 날으자
오 민족흥망이 오늘에 있구나
정열로 뛰는 심장에 피곤이 있으랴
촬영팀은 이 노래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선배들은 지난 50년의 세월과 한얼의 역사, 김상진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조국의 민주주의 역사 제단에 몸을 바친 열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윤석열 탄핵 가결과 앞으로의 상황 전개에도 과거가 동력으로 작동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그리고 추진위원장으로 내년 김상진 열사 50주년 기념사업 진행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한얼 모임과 경로경로에 적극적으로 뜻을 모아 힘을 보태주시겠다고 제게 마음을 주셨습니다.
늦은 저녁, 귀갓길 다큐<1975.김상진> 만들 때도 그렇지만
상진형을 만나는 날은 아릿하면서 동시에 잘살아야지 하며 뜨거워집니다. 산자로서 역사에 아로새겨진 형님을 어떤 방식이든지 돕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하늘에 계신 형님과 나는 서로 돕고 돕는게 분명합니다.
오늘 여정에 함께해주신 선배들과 장영철PD에게 감사인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