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자

마무리

by 장아연


원천강 오늘이는 자아를 찾는 '구복 설화' 중 하나이다. 이 구복 설화는 원천강 오늘이 외에도 복 타러 간 청년 같은 설화로 이어졌다. 즉, 과거부터 자아를 찾는 여정은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었단 소리다. 내가 오늘이를 택한 건 오늘이가 어린이기 때문이었다. 9살 어린이의 눈에 오늘이는 나와 비슷한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다시 원천강 오늘이를 펼칠 무렵엔 난 9살에서 벗어났다. 17살부터 25살까지. 나는 자주 오늘이를 펼쳤으며 그걸로 소설을 적었다. 그 소설은 여전히 내 컴퓨터 파일 가장 안쪽에 남았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펼쳤다. 어린 내가 생각하는 무궁무진한 세계-오늘이가 그토록 찾던 원천강이 눈앞에 드리운 기분이었다.


지난 4월, 내 삶은 무너졌고 다신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주 비정했으며 매정했다. 넘어질 때마다 알아서 일어났고 내 요새를 점검했다. 수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돼. 외로워도 안락한 글의 품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내겐 아무것도 없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자유로웠다. 언제까지고 그럴 줄 알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질문을 내게 자주 물었다. 당연히 답은 없었다. 무너진 삶을 재건할 수조차 없었다. 계속 구멍 난 곳을 메우는 식으로 살아오던 내게 이제 덧댈 천조차 남지 않았다. 아예 구멍이 뚫린 옷가지처럼 방도가 없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어두운 방 안, 빈 속에 소주를 들이켠 채 취해서 잠을 잤다. 깨고 나면 울음이 터졌고 하루는 내게 지옥이었다.


'너 정말 이렇게 살 거야? 앞으로 영원히 계속?'


부스스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몰골이 가관이었다. 두 눈동자는 잔뜩 부었고, 소주를 들이부은 위장은 썩어갔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었던 시간 속에서 나는 멀쩡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학원에 출근하기 바로 직전엔 '나는 강사다.'를 수백 번 외웠으며 아이들에게 내 부정적인 감정이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학원에서 나는 웃긴 어른이었고 좋은 강사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불 꺼진 방 안에서 점차 잠식되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멀쩡해지기 위해 애쓴 건 폐인이 된 지 사흘째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문장들을 어떻게든 토해낼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물론 그 문장들은 너무도 날 것인 나머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의 나도 그 문장을 보면 숨이 멎을 듯이 버거웠다.


더는 남의 인정과 사랑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나로서 완벽하고 싶었다. 타인이 주는 사랑이 얼마나 얄팍한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너도 어차피 나를 떠날 거잖아, 따위의 말들을 드라마 대사 외엔 뱉고 싶지 않았다. 모든 고통은 박제하고 소화하면 그만이었다. 추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내 욕망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빛이 바랜 설화를 꺼내는 순간, 나는 그곳에서 내 어린 시절을 보았다.


내 과거, 현재, 미래를 마주했으며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통과하면서 많이 성장했다. 아팠던 시간은 훈장처럼 남았다. 시간과 계절의 신인 오늘이가 나를 도운 건가? 심장을 토할 것 같았던 순간들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나는 기록의 순기능을 발견했다. 항상 허구가 가득한 소설 세계관을 만드는 내게 현실을 직시한 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떤 고통은 정면으로 직면해야 떠나갔다. 수면 밑에 고이 잠들었던 것들이 터지는 순간,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는지. 어둠은 고통을 먹고 자라났다. 막상 마주한 건 생각보다 자그마한 감정이었다.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나는 자그마한 그걸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갑옷을 두른 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 그럼 상처 입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왜 나는 그렇게 오래 아파했을까. 한 자리에 오래도록 앉은 채 흉터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 번도 자리를 이탈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걸 깨달으니 이 모든 게 허무했다.


아, 나는 너무도 오래도록 날 괴롭혔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사실 나라는 걸. 남이 날 구원해 주길 바랐지만 이미 알았다. 구원은 셀프라는 걸. 오늘인가 황무지의 평온한 삶을 버리고 원천강으로 떠난 것처럼 나 또한 그래야겠다고. 다신 돌아보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짐을 쌌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신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 긴 여정의 종지부를 마친다.

일단 오늘을 살기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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