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늙어서 할머니가 되었으면 했던 나날들
일하는 나를 좋아했지만,
“빨리 늙어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
27, 28살 무렵의 내가 매일 하던 생각이었다. 그 당시 나는 P&G에서 3년은 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력에 X표를 쳐가며 버티고 있었다. 취업이 너무 어려워 원하던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뼈를 묻을 각오였고, 회사 일이 힘들다 한들 취업준비보다 힘들겠냐는 생각이었는데, 단단히 착각했다. P&G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는 '꽃길만 걷자'며 다이어리에 꽃까지 예쁘게 그려 넣었는데 정확히 1년 반 뒤, 27살의 나는 꽃길 대신 '빨리 늙어서 할머니가 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는 입사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쓸모 있음을 증명하라고 했다. 트랙 위에 신입들을 세워놓고 얘가 잘하는지 쟤가 잘하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미팅에서 내가 얼마나 상황을 잘 리딩하는지 보여줘야 했다. 밤 12시에 전체 빌딩에 불이 꺼지면, 동기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불을 다시 켜고 자리에 앉았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모두들 가고 싶어 하는 회사들 중 하나였고, 이곳에서 힘든 만큼 나중에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지만 아무도 일찍 집에 갈 수 없었던 회사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었다.
입사하고 2년쯤 지났을 때, 매니저가 나를 불러놓고 한 달 안에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동기들과 나를 두고 보았을 때 잘하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한 달 안에 내가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 관계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매니저가 나간 후 텅 빈 미팅룸에서, 매니저가 한 달 안에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고 적어온 프로젝트 리스트를 멍하게 볼 뿐이었다.
회사라는 곳은 언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회사 역시도 나를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생각에, 먹고산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내 삶에서 해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것도, 그당시 결혼도 안 했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모두 숙제처럼 느껴졌다.
이미 턱 끝까지 찼고 더 버티고 싶지 않았다. 잘하고자 나를 더 이상 채찍질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나에 대해 의심할 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로, 얻을 것 하나 없는 증명에 응했다. 한 달 내에 보여줘야 했던 업무들을 잘 끝냈고, 회사는 더 이상 내 능력에 대해 증명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특성상 비즈니스 상황이 요동칠 때마다 개인에게 또다시 책임을 물었다. 내가 맡고 있던 비즈니스는 여전히 상황이 좋지 못했고, 1년 후 다시 회사는 내게 쓸모 있음을 물었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
이 와중에 회사는 직원 복지라는 이름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했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심리 상담에서 만난 상담사는 나를 보고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라고 했다. 내 마음과 몸은 이미 빨간 경고등을 켜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잠깐 쉰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내 밥벌이가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극에 달했고 ‘그래 너 힘든 거 알아. 좀만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파도가 마모된 방파채를 쉴 새 없이 치듯, 끝도 없이 터지는 예측지 못하는 일에 생겨난 스트레스는 이미 지쳐버린 나를 칠 뿐이었다. 무기력했다.
우리 사회는 그냥 그만두는 사람을 여전히 낙오자로 보고 있었다. 이직할 때 ‘왜 퇴사했느냐’, '쉬는 동안 무엇을 했느냐' 같은 질문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질문에 ‘힘들어서요’라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달래는데 바빴다.
‘너 힘든 거 알아. 이번 달만 버텨볼까’
커리어를 그리면서 마음 지키는 법
그렇게 힘들어하던 날들도 지나고 어느새 11년 차가 되었다. 내 이력서만 보면 흔들림 없이 커리어를 잘 그려온 것처럼 보인다. 이력서에는 모든 감정이 빠지고 객관적으로 내가 했던 결과물만 남는데, 이력서 사이사이에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던 이야기가 가득하다. <마음 단단히 일합시다>에서는 일하면서 마음이 힘들었던 날들에 중심을 잡으려 내가 했던 고민들에 대해 남겨두기로 했다.
다양한 마음 힘듦을 겪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마음이 힘들었던 이야기는 다양했다.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하루를 버티는 느낌의 날들은 종종 찾아왔고, 아무 걱정 없는 평온한 날들은 적고 소중했다.
- 내 스스로 세워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있었고,
- 반대로 매일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느라 버거웠던 때도 있었다. 회사 일이 너무 어려워 주말 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진이 빠져 집에 돌아와 불 켤 힘도 없던 날들을 기억한다.
-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도 힘들 때가 많았다. 초년생 때는 매니저와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지, 연차가 쌓이면서 프로젝트를 리드할 때는 타 구성원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했고, 팀장이 되어서는 처음 겪는 팀장의 외로움에 놀랐다.
이처럼 힘들었던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나는 비슷하게 힘들었다. 게임캐릭터가 레벨업 하듯, 좀 적응했다 싶으면 그동안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 새로운 이해관계, 날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깨달았다.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날들이 전혀 없을 수만은 없다는 것.
일을 하면서 개인이 조직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환희를 경험하는 날도 있는 만큼, 조직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겪을 필요가 없었을 마음 다침을 겪는 것도 당연히 있다는 것.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또 다른 힘듦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 내면의 나를 돌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자리에서 해결책 찾기
지금 당장 도망친다고 해도 밥벌이는 계속되어야 하고 언젠가 다시 재기해서도 겪을 수 있는 문제니까,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랑새를 찾아 떠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 내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커리어는 지속하고 싶은데 마음 힘듦을 겪을 때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알고 싶었다. 다들 어떻게 이런 힘든 생활을 버티고 있나 궁금해 서점을 찾아보면,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는 이야기와 또 다른 한편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퇴사를 하고 세계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뿐, 내게 맞는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내 스스로 이 답을 찾겠다고 다짐하고 어느새 11년 차가 되었다.
두 개의 균형
그 시간 동안 회사 안에서 마음 단단히 일하는 것은 '내가 기꺼이 괴로워할 수 있는 곳에서 균형 잡기'라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 마음 단단히 일하기 위해서는
1) 내가 기꺼이 괴로워할 수 있는, 내게 맞는 일을 찾고,
2) 그곳에서 내 마음의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했다.
내게 맞는 일이 아닌 곳에서 마음 단단히 하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할 뿐이고, 내게 맞는 일을 찾아도 밥벌이는 힘들 수밖에 없어서 마음 단단히 일하는 법을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추천하는 것은, 파트 1부터 꼼꼼히 읽는 것이다. 하지만 파트 1은 장기적으로 내게 맞는 일을 어떻게 찾는지부터 이야기한다.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당장의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파트 2에 자신의 고민에 해당하는 영역부터 읽고 긴급처방전을 내리면 좋겠다.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날이 전혀 없을 수만은 없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나와 더 잘 지내보기로 했다. 파랑새를 꿈꾸며 어딘가로 훌쩍 떠나기 전에,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다.
떠나기 전에,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지킵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