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관찰기
지난 글까지는 내가 왜 휴직을 결정했는지, 회사 밖에서 나에게 맞는 일을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그게 글쓰기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글에 올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에 남편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남편은 안정 추구형, 나는 변화 추구형. 결혼하고 8년 동안 이 주제로 몇 번을 부딪혔다. 하지만 지금 남편 덕분에 글에 올인하고 있는데, 이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아이를 잘 키울 것, 단정한 문장 하나
남편은 안정 추구형이다. 그에게는 ‘아이를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키우기’라는 문장 하나만 있다. 그래서 그의 일상은 단정하다. 평일엔 일하고, 주말엔 아이와 논다. 아이와 잘 놀아주려면 체력이 필요하니 아침엔 러닝을 한다. 일찍 퇴근해 아이를 재우고 다시 일하고, 다음 날 아침엔 또 러닝. 이런 단정한 일상이 깨지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는데 가깝다.
반대로 나는 변화 추구형에 더 가까운데, 특히 내 직무가 마케터이고 스타트업 씬에 있다 보니 3년 단위로 이직을 하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불안해했다. 그 시기가 오면 ‘또?’라고 말하며 긴장했었다. 그래서 ‘아 오늘 회사 힘들었네’ 투정이라도 부릴라 치면, 그 이야기의 결론이 이직과 같은 변화가 될까 싶어, ‘나도 힘들어. 직장인들 다 힘들지’로 벽을 세워 버리는 것이다.
결혼을 한다는 것
두 명의 성인이 만나 가족이 된다는 것. 결혼 8년 차가 된 지금도 그 개념이 여전히 신기하다. 결혼 전 남편은 이수동 시인의 <동행>이라는 시를 보여주며 말했다.
꽃 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 10년이면 10번 변하겠지만
나는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테니
길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 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내가 자리를 지킬게. 너는 하고 싶은 걸 하자.
그렇게 우리는 결혼했다. 그런데 가족이 되고 보니 나의 변화 추구로 인해 남편의 안정 추구 성향이 더 강해져 버렸다. 남편이 자신과 비슷한 안정 추구형을 만났다면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 되니 ‘나’라는 범주도 커져서 아내인 나 역시도 ‘나’의 범주에 속해버렸다. 그래서 아내 역시 안정을 추구했으면 하고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결혼을 하고서야 남편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남편 입장도 조금 황당할 것이 나는 결혼 전까지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고, 매일 글 쓰는 모습이 쌓여 ‘진득하게 글 좀 써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시점까지 오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나 역시도 몰랐던, 상상조차 못 했던 모습이다. 결혼을 하고서도 나와 배우자는 계속 성장하고 바뀌고, 그래서 결혼 전에 감수하겠다고 생각했던 서로의 모습 그 이상을 보게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날개를 붙잡는 손
그리고 의사결정을 할 때 더 이상 혼자서 결정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결혼이 참 무서운 제도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싱글이었다면 진즉에 그만두고 제주에 내려가서 쉬었을 만큼 힘든 시기이기는 했다. 그래도 남편은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하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나는 정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내 머리밖에 없어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버텼다. 그때 무슨 느낌이었는지 돌이켜보면, 나는 날고 싶은데 남편이 더는 날지 못하게, 내 날개를 꽉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남편은 자신이 어떤 느낌인지를 말해주었는데, 이 새가 계속 날 수 있는데 자꾸 날갯짓을 멈추려 해서, 양손으로 날개를 잡고 날도록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다고 했다.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보다니 세상에)
그래서 내가 씩씩대면서 ‘나중에 진짜 글 터지면 너 국물도 없다’라는 말을 했는데, 남편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보여줘 봐 보여줘 봐’라고 말했다. 악에 받쳐서 반, 정말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시점까지 와서 반.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밤 12시가 되어 밤에는 글 쓸 시간이 정말 안 나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최소 한 시간씩 글을 쓰고 출근하기를 반년 이상 했다. 그리고 휴직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정리해서 브리핑을 했다. 그 긴 시간의 논의 끝에 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차치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남편 입장에서는 엄청난 결정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는 고민되지 않았는지
지난주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휴직했다는 소식에 현실적인 문제는 고민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자신도 쉬고 싶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현실적인 문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과금, 보험료, 대출이자 등 남편이 알아서 모든 것을 관리하니까. 나는 그저 내가 오늘은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글로 남기고 싶어 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현실적인 성격이었지만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고민을 내려놓은 것이다.
날도록 돕는 손
내가 남편 때문에 날개가 붙잡힌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 손이 내 날갯짓을 지켜준 손이었다. 안정 추구형 남편을 만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에 올인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인 문제는 늘 남편이 고민하니까.
나는 남편만 설득하면 되니까.
그래서 남편이 나를 옥죄는 것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 가서 내게 글 쓸 시간을 확보해 준 건 남편이었다. 내가 만약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면, 주말마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이번 주는 누가 애기를 볼 거냐는 아이에게 미안한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을까.
그냥 ‘우리 가족을 잘 지킨다’는 단정한 문장 하나만 갖고 있는 남편을 만나서, 내가 글도 쓰게 되고 다른 걸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도 맞으니. 내가 무언가 바꾸고자 할 때마다 따뜻하게 공감하고 바로 응원은 못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늘 나는 내가 원하는 변화를 모두 가졌었다.
그래서 매일 주말마다 아이와 갈 키즈카페를 찾아보는 남편을, 다른 동네를 지날 때면 호갱노노 어플을 열어 시세를 확인해 보는 남편을, 더 감사하고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