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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a May 13. 2020

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

전혀 나태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의 고백

Strength finder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정의내린, 내 강점 중 하나는 초점이다. 끊임없이 내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내면 속 목소리가 울린다. ‘너 이렇게 살아도 돼?’


고등학생 때는 대입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그 때는 목표에서 벗어날 때 버저가 울리는 것이 강점이었으나, 문제는 서른을 넘긴 지금도 버저는 계속해서 울려 댄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내면 속 목소리가 단순히 ‘회사 잘 다니고 있니?’라는 질문을 던지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시각에서 내가 커리어를 잘 쌓고 있는지 묻는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지, 지금 하는 일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지금은 A라는 회사를 다니지만 넥스트 스탭이 그려지는지, 지금 하는 일이 먼 훗날 내 사업이든 내 에고든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지, 그러면서도 이직 시장에서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보여줘야 하므로 돈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충분히 보상받고 있는지.


이런 여러가지 파트에서 내면의 질문이 들려오고, 그 기준도 까다로워서 버저는 꽤 자주 울리고,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잦은 이직이라는 결과로 보여진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문제로 인지조차 못한 일들에 대해서도, 기저에 깔린 근본 원인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해결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판단하면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내가 예민한 만큼 빠르게 이루어진다.

 

주변 사람들은 회사는 그저 돈을 주는 곳이고, 꼬박꼬박 월급만 나오면 괜찮은데 넌 무엇이 그리 힘드냐고 하는데, 나는 회사 일을 애초에 남의 일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마케터라는 직무의 특성도 있겠지만, 퇴근을 했더라도 다른 회사의 캠페인을 보면서 '우리 회사에 이렇게 적용하면 좋겠다.', TV를 보다가도 '와 저기에 PPL 해봐도 좋겠다.' 등등 내가 곧 그 브랜드고, 브랜드를 떼어놓은 내 삶은 사실상 상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브랜드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곧 나의 문제고, 버저가 울릴 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해결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문제라면 내 전체 커리어를 생각하며 떠나버리는 것이다. 문제없는 회사, 완벽한 회사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내 초점이라는 강점 때문에 현실과의 타협은 전혀 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마케터 5년 경력이 쌓이면서 마케터로서의 러닝 커브가 줄어들자,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마케터'라는 직무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 좋은 마케터로 성장하고 있나?’라는 질문이, '마케터로서 너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니?' 라는 질문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내 업무에 모르던 것이 많아 배우는 재미가 있었고, 다니던 회사에서 충족되지 못하던 것은 이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가령 브랜딩을 더 배우고 싶다라던지, 이커머스 데이터를 다루고 싶다던지 이런 니즈에 따라 이직하고자 하는 회사가 있었고, 이직의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회사를 가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프레임과 내가 하는 일 자체는 바뀌지 않고, 마케터의 업무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생활용품 시장에 있든, 스타트업에서 아예 새로운 카테고리에 있든 그 기반에 있는 직무는 동일해서 초반 2~3개월은 해당 인더스트리를 이해하는 재미가 있지만, 3개월이 지나고 나면 여기도 저기도 사실 다 똑같은 회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하면 신규유저를 높일지, 어떻게 하면 전환율을 높일지, 어떻게 하면 객단가를 높일지 시장은 다르지만, 내가 하는 고민, 내가 가진 프레임은 사실 바뀌지 않는다. 오만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배움이 없다는 생각, 내가 세상을 보는 프레임의 지겨움, 이렇게 5년 짬밥을 먹었다고, 이제는 직무에 대한 고민까지 오게 되었다.



 친구가 그랬다. 나라는 사람은 그냥 만족하고 살아도 되고, 나 역시도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끊임없이 불편함을 찾아내고 있다고.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버저가 울리고 있다고. 그리고 거기에 더해, 연차가 차고 러닝커브가 완만해지자, 마케팅 관련 커리어를 잘 쌓는지만 물어보던 내면의 목소리가, 이제는 마케터를 넘어 내 사업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거다. 마케터 일이 조금은 쉬워지면, 이걸 즐기면서 해도 되는데, 내 에고는 큰일이라도 난 듯, '너 성장하고 있는 거 맞아? 새로운 직무로 확장해야 하는 것 아니야?' 등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현재 하고 있는 마케터 일도 잘하면서 먼훗날 사업까지 해보려고 2개의 목표로 버저가 울리다 보니,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루를 끝내게 된다.


사실 내가 오늘 행복했다고 만족하는 하루의 모습은 특별한 게 없다.

햇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실컷 책을 읽는 것. 그거 하나면 나는 하루가 완벽했다고 느끼는데, 거기엔 내가 다니는 회사 이름도 없고, 내 직함도 없는데 무엇이 그리 나에게 채찍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부터 내가 꿈꾸는 건, 당신과 나태하게 늙는 것. 빨리 늙어버려서 커리어도 다 의미없는 나이가 되어 햇볕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꿈을 가진 내 마음 속에는 오늘도 버저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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