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그 말을 해줄 수 있어 다행이다.
엄마는 틀리지 않았다
서울 사는 딸을 보겠다고 엄마가 올라왔던 그 날 밤, 엄마에게 그 말을 해줄 수 있어 다행이다.
떨어져 산지 어느 덧 11년. 엄마와 나 사이에 공통의 이야깃거리는 더 이상 없고, 저녁을 먹는 내내 엄마는 내가 맛있다고 한 반찬의 요리법을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국간장 한 숟갈은 꼭 넣어라, 너희 집에 새우젓이 있던가?" 다음날 출근을 앞둔 내게 엄마의 그 걱정거리, 가령 냉장고에 콩나물이 맛이 갈 것 같다는 둥, 밥을 할 때 식용유를 한 두 방울 넣으면 윤기가 흐른다는 둥의 이야기는 내게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엄마와 제대로 된 이야기 하나 나누지 못한 채 엄마가 내일 시골로 내려가버리면, 내 남아있는 마음이 편치 않을 거란 생각에 집에 있겠다는 엄마를 이끌고 집 앞 한옥카페로 갔다. 집에 있겠다던 엄마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린아이처럼 집에 있던 막대사탕을 물고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렸을 적 엄마와 문방구에 다녀오면서 볼펜 하나에 행복해 하던 순간들, 닭꼬치 하나에 행복해 하던 시간들. 기억에 잊혀졌던 그런 순간들이 막대사탕을 볼에 문 엄마와 겹쳐보이기도 했다.
한옥카페에서도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엄마는 한옥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 전화통화 너머로 늘 들어왔던 허리가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는 이야기 등 토막토막 끊어진 이야기들을 내뱉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는 기승전결이 있고, 내 삶에 있어 어떤 고민을 하는지까지 쉽게 터놓을수 있는데, 엄마와는 깊이가 한없이 얕은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조금 하다가 끊어지고 조금 하다 끊어지던 그런 밤이었다. 가족의 끼니처럼 엄마에게 중요한 것들은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게 중요한 커리어 고민은 엄마가 전혀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고민은 남겨둔채 그저 머리를 스치는 가벼운 이야기만 계속해서 나누었다. 그런 토막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런 엄마가 답답해서 화가 나기도 했고, 엄마의 세상이 안쓰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살갑게 엄마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내가 싫기도 하면서, 그냥 엄마가 얼른 서울을 떠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엄마의 사우나 고민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는 어깨가 늘 아팠고, 아픈 어깨를 조금이라도 풀어주려 사우나를 다니는데, 다음주 금요일까지 1달 등록 시 1달 무료로 서비스를 주는 프로모션이 있는데 금액이 너무 비싸 못 갈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비싸길래 고민하나 했더니 월 6만원이었다. 프로모션까지 치면 월 3만원. 매일매일 갈 수 있는 사우나에 월 3만원. 엄마는 그 금액이 비싸다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네일 케어를 받은 내 손이, 6만원은 거뜬히 넘는 케어를 받은 내 손톱이 부끄러웠다. 내게는 한 번의 네일 비용으로 쓰는 금액이 엄마에게는 두 달의 사우나 비용이라는 생각에, 내가 쓴 돈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엄마는 스스로 버는 돈이 없기 때문에 위축이 된다했고 한푼도 못 버는데 내가 나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진다했다. 엄마와 스스럼없이 내 고민을 나누진 못했지만, 엄마의 세상을 바꿔놓진 못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엄마는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빠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이렇게 사회구성원으로 제 몫을 하는 것도 엄마 덕분이라고 했다. 엄마의 돌봄노동은 정말 소중하고, 아빠가 버는 돈의 절반은 엄마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발 아무 고민없이 그 정도 금액은 엄마를 위해 쓰라고 했다. 그 날 저녁부터 밤까지 엄마에게 느끼던 그 복잡미묘한 생각들 속에서도 엄마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줄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우나 꼭 등록하라며 엄마에게 그 자리에서 10만원을 줄 수 있어서, 그러면서도 엄마가 지금 이대로도 소중하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는 내가 3살 무렵에 미용을 배우려 했다고 한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을 어린 내가, 엄마의 신발을 숨겨가며 가지말라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의 경제 독립 시도는 실패했고, 엄마는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이야기를 한다.
그 당시 엄마 주변에, 아이가 울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서로 공유하기 쉬웠다면, 엄마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그 날 밤 카페에서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엄마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고 그게 후회로 남는다고 했다.
내가 젊은 날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엄마의 신발을 숨기던 나는 더이상 그런 기억은 없으니, 아이에게 엄마의 손이 필요한 그 잠깐을 위해, 엄마를 전부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엄마가 무슨 선택을 하든 엄마는 옳고 소중하다고. 젊은 날의 엄마를 만날 수 없기에 엄마의 전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는 해주지 못했지만, 엄마는 소중하다는 이야기는 해줄 수 있던 밤이었다.
내가 먼훗날 아이를 낳고서도 계속해서 일을 하려고 하고, 일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시절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 같다. 엄마가 몇 십년이 지나서도 그 때를 후회로 그리는데, 젊은 엄마가 그렇게 찾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슈퍼우먼이 아니어도 내 커리어도 쌓고, 아이도 잘 키울 수 있다고. 그런 사회가 되도록 바꾸진 못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옥카페 나들이는 따뜻하게 끝났고, 여전히 밥에 윤기 내는 방법이 엄마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한들 엄마는 틀리지 않았고 엄마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