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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a May 11. 2022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아휴직을 가는 것이지만, 1년 뒤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 또한 맞으므로, 어쩌면 '떠났다'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남기는 것에 대해 여전히 고민도 많지만, 감정은 다 빼고서 기록으로서 남겨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작년 10월 회사의 방향성이 바뀌게 되었다.

시리즈 B가 잘 마무리되어가던 상황이었고, 곧 입금될 110억이라는 돈은 앞으로의 회사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액으로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동안은 널뛰는 꽃의 수요 변동에 맞춰 인력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 돈으로 넓은 작업장과 기계화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꽃의 일상화'라는 비전에 맞춰서 다양하게 꽃을 소비하는 모습을 제시할 수 있게, 선물용에 치중되어있던 라인업을 일상용으로 확장하는 작업도 필요했고, 앞으로 재밌는 일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보내던 시기였다.

그런데 작년 10월, '어느날 대표님이 우리도 브랜딩 좀 해보자고 말했다'라는 책 이름처럼, 앞으로 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차치하고서 대표님은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리브랜딩이라고 말했다. 리브랜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은 공감했다. 1년 새 비슷한 플레이를 반복하면서 분명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이 분명 있었다. '행복한 날에는 늘 꽃이 있듯이, 꽃과 함께하면 당신의 일상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분명히 전하던 메시지가 있던 우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사가 '매출액'이라는 숫자만 보고 달리면서, 메시지는 메시지로만 남고, 꽃팔이와 다를 바 없이 플레이를 했던 것도 맞으므로 공감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 브랜드가 왜 시작했지? 우리 브랜드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등의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리브랜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쉬웠던 리브랜딩 과정

그러나 대표님이 그렸던 리브랜딩의 방향성은,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다. 그가 리브랜딩의 목표로 제시한 브랜드는 논픽션, 탬버린즈, 노티드 도넛 등 명확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는 인더스트리도 다르고, 이제 막 시작한 브랜드들이 그가 제시한 방향이었다. 이미 우리는 온라인 기반의 연 매출액 100억인 브랜드인데, '꽃의 일상화'를 꿈꾸는 대중적인 브랜드였는데, 신생의, 힙하고, MZ세대에게 사랑받고, 오프라인 기반의, 감각이 뛰어난 브랜드를 목표로 제시했다. 대표님이 의도했던 바는 이해한다.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브랜드의 활동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팬덤'이 형성되어서, 우리가 무얼 하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방향을 원했던 것은 이해했지만, 작년 10월부터 4월까지 6개월에 걸친 그 과정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꽃 인더스트리를 가장 잘 알고, 우리 브랜드를 사랑했던 기존 인력들은 리브랜딩의 논의에 함께 하지 못했다. 대표님과 새로 영입된 분들이 리브랜딩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고객은 누구인지? 지금 고객의 가장 큰 pain point는 무엇인지? 우리의 어떤 상품이 가장 사랑받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을 논의할 수 있는 인터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기존 브랜드의 리브랜딩을 진행하는데도 기존 브랜드의 색깔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고, 그렇게 나온 새로운 로고, 새로운 홈페이지, 새로운 상품들은 낯설기만 했다.


적어도 예전 브랜드에 대해서 나는 자부할 수 있었다. 우리가 따뜻한 노란색을 썼던 이유는, 우리가 이 문구를 썼던 이유는, 우리가 왜 많은 상품안 중에서 정기구독을 강조했던 이유는, 우리가 이 폰트를 썼던 이유는. 모든 것이 '행복한 날에는 늘 꽃이 있듯이, 꽃과 함께하면 당신의 일상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당신의 일상이 꽃과 조금은 더 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따뜻한 노란색의 상자에 꽃을 담아 보내드렸고, 꽃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려고 했고, 2주에 1번씩 받게 되는 정기구독 상품을 통해서 사람들이 '일상의 꽃'에 대해 경험해보길 바랬기 때문에 우리는 객단가가 더 높아 팔기 힘들지라도 정기구독을 늘 메인 상품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리브랜딩으로 바뀐 새로운 브랜드는 그 이유가 없었다. 왜 이 로고를 쓰는지, 왜 이 상품을 파는지, 왜 이 포장지를 쓰는지, 왜 홈페이지에 리뷰 기능이 사라졌는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브랜드의 방향성은 없는 채로 리브랜딩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내게 공유되지 않았더라도, 내가 모르는 큰 뜻이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4월이 되어 리브랜딩은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마케팅을 할 차례라고, 이제야 내 차례가 왔다고 이제 물건을 팔라고 했다. 마케터를 단순히 광고를 틀고, 대행업을 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한계를 느꼈다.


그렇게 직장인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19년부터 마케팅팀을 시작으로 회사를 바꿔나가면서, 그리고 회사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케터가 비즈니스를 리드할 수 있는 스타트업에 온 것에 후회 없이 일했다. 그런데 내가 대표가 아닌 이상, 대표님이 방향키를 쥐고서 조직을 바꿔나갈 때, 그동안 만들어왔던 모든 프로세스들이 무너지고, 기존의 브랜드 활동들이 부정당할 때, 내가 입사하기 전의 회사 모습으로 회귀한 것을 발견했을 때, '직장인'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내가 지난 6개월간 마주했던 현실은, 내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대표가 원하는 것이 명확할 때는 '따르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그동안 기다리던 아이를 갖게 되었다.

평소의 나라면 '따르거나 떠나거나'라는 선택지에서 주저 없이 '떠나거나'를 선택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임신을 한 순간, 임신한 여성이 이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므로, 내게 선택권은 '따르거나 경력단절이 되거나'라는 선택지만 주어졌다. 덕분에 예전의 나라면 겪지 못했을, 이런 상황을 옆에서 보면서 회사가 어디까지 변화되는지를 피부로 느끼며 지켜볼 기회 또한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브랜드는 사라졌다.

물론 이렇게 바뀐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을지 아닐지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들의 취향은 너무나 다양하고 내가 옳다고 말하는 것 또한 아집이기에 판단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좋아서 신나게 마케팅하던 브랜드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고서는 마케팅을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는데, 제로 베이스에서 내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1년의 시간 후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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