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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a Oct 24. 2022

내 마음 지키면서 일합시다

떠나기 전에,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지킵시다.

“빨리 늙어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

27살 무렵의 내가 매일 하던 생각이었다. 그 당시 나는 P&G에서 3년은 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력에 엑스표를 쳐가며 버티고 있었다.


회사는 내가 입사한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쓸모 있음을 증명하라고 했다. 트랙 위에 직원들을 세워놓고서, 얘가 잘하는지 쟤가 잘하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인데 상대 회사에서 과장, 부장이 나오는 미팅에 혼자 던져지기도 하고, 미팅에서 내가 비즈니스 리더로서 얼마나 잘 상황을 리딩하는지 보여줘야했다. 밤 12시에 전체 빌딩에 불이 꺼지면, 동기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불을 다시 켜고 자리에 앉았다. 구성원 모두들 힘들어 했고, 나 역시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들 오고 싶어하는 회사들 중 하나였고, 이 곳에서 힘든 만큼 나중에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지만 아무도 집에 일찍 갈 수 없었던 회사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었다.


입사하고 2년쯤 지났을 때, 매니저가 나를 불러놓고 한 달 안에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동기들과 나를 두고 보았을 때, 나는 잘하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안에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우리 관계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매니저가 나간 후 텅 빈 미팅룸에서, 매니저가 한 달 안에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적어온 프로젝트 리스트를 멍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회사라는 곳은 언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회사 역시 나를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생각에, 먹고산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내 삶에서 해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좋은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것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모두 숙제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미 턱 끝까지 찼고, 더 버티고 싶지 않았다. 잘하고자 더 이상 나를 채찍질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나에 대해 의심할 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로, 얻을 것 하나 없는 그 증명에 응했다. 한 달 내에 보여줘야 했던 업무들을 잘 끝냈고, 회사는 더 이상 내 능력에 대한 증명 따위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는 비즈니스 상황이 요동칠 때마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 물건이 안 팔리는 것에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 당시 카테고리의 상황이라는 외부적 요소도 분명 영향을 끼치는데 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물었다. 내가 맡고 있던 비즈니스는 여전히 상황이 좋지 못했고, 1년 후 다시 회사는 내게 쓸모있음을 물었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

이 와중에 회사는 직원 복지라는 이름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했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심리 상담에서 만난 상담사는 나를 보고서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라고 했다. 내 마음과 몸은 이미 빨간 경고등을 키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잠깐 쉰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내 경력이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극에 달했고 ‘그래 너 힘든 거 알아. 좀만 버텨보자’ 라고 스스로를 채근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파도가 이미 마모된 방파채를 쉴 새 없이 치듯, 끝도 없이 터지는 예측치 못하는 일에 생겨난 스트레스는 이미 지쳐버린 나를 칠 뿐이었다. 무기력했다.


나는 이 회사를 다니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런 회사도 다녀본 내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남들이 인정해주는 곳을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그 곳에서 내 내면이 다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3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사한 사람을 여전히 낙오자로 보고 있었고, 이직할 때 무조건 ‘왜 퇴사했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힘들어서요’라는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나를 달래는데 바빴다.

‘너 힘든 거 알아. 이번 달만 버텨볼까’


커리어를 그리면서 마음 지키는 법

P&G와 스타트업 등을 거치며 마케터로 살아가고 있다. 내 이력서를 보면 흔들림 없이 커리어를 잘 그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매일의 회사 생활을 보았을 때 마음이 늘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커리어를 잘 만들어나가는 것과 별개로, 회사 생활에서 내 마음이 다칠 때가 많았다. 이력서에는 모든 감정이 빠지고 객관적으로 내가 했던 결과물만 남는데, 그 이력서 사이사이에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내 마음 지키면서 일합시다> 에서는 일하면서 마음이 힘들었던 날들, 그 날들에 중심을 잡으려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 남겨두기로 했다.


다양한 종류의 마음 힘듦을 겪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마음이 힘들었던 이야기는 다양했다.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버티는 느낌의 날들은 종종 찾아왔고, 아무 걱정 없는 평온한 날들은 적고 소중했다.

- 내 스스로 세워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있었고,

- 반대로 매일매일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느라 버거웠던 때도 있었다. 회사 일이 너무 어렵고 미팅에서 만날 질문들이 무서워 주말 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출근하는 아침 화장대 앞에 앉아서 오늘만 버텨달라고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루종일 회의를 끝내고서 집에 돌아와 너무 힘들어 불켤 힘도 없던 날들을 기억한다. 내가 커리어를 그려나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성장하고 있는가?’였지만, 마음이 힘들 때는 더는 성장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도 힘들 때가 많았다. 초년생 때는 매니저와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지, 연차가 쌓이면서 프로젝트를 리드할 때는 타 구성원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했고, 팀장이 되어서는 처음 겪는 팀장의 외로움에 놀랐다. 사람을 좋아했지만 더는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혼자서 일할 직무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회사 일에 끌려가다보면 곧잘 회사에서의 나만이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내 멘탈 그래프는 일의 상태에 따라 요동쳤다. 일이 잘 되고 회사 생활에 문제가 없을 때는 자아실현을 느끼면서 신나게 일을 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멈춰버리고 싶을 만큼 애증을 느꼈다. 일로 확 기울어버린 외줄타기에서, 여러 번 마음이 지친다는 것을 느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 마음 달래기에만 급급했었다.

이처럼 모든 날들이 힘들었던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나는 늘 비슷하게 힘들었다. 게임캐릭터가 레벨업 하듯, 좀 적응했다 싶으면 그동안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 새로운 이해관계. 날이 갈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깨달았다.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내는 날들이 전혀 없을 수만은 없다는 것.

일을 하면서 개인이 조직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환희를 경험하는 날도 있는 만큼, 조직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겪을 필요가 없었을 마음다침을 겪는 것도 당연히 있다는 것.

이직을 하던 다른 일을 하던 간에,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바뀐 상황에서도 또 다른 힘듦을 맞닿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 단단해져야 할 내면의 나를 돌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자리에서 해결책 찾기

물론 내가 겪는 마음 다침이 사실 회사를 떠나기만 하면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는 부딪힐 일 없는, 쉽게 해결될 상황이라는 것이 단단해져야한다고 되새기는 나를 우습게 만들기도 했다. 떠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부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냥 놓아 버렸을 때 잃어버릴 것들을 아직 계산할 수 있을 만큼 덜 지쳤을 수도 있지만, 당장의 밥벌이, 연봉협상력, 커리어 등등 잃게 될 것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내려놓고 나면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오로지 내가 진다는 사실 역시도 무겁게 다가왔다. 살아있는 한 밥벌이는 지속되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도망친다고 해도 언젠가 다시 재기해서도 겪을 수 있는 문제니까,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은 드는데 마음이 힘들 때, 커리어는 지속하고 싶은데 마음 힘듦을 겪을 때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파랑새를 찾아서 떠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 내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밥벌이가 지속되는 한, 살아있는 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내는 날이 전혀 없을 수만은 없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나와 더 잘 지내보기로 했다. 나와 사이좋게 지내고, 균형을 잡고 더 오래 일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기 전에,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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