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 같은 놈.'
나는 무언가 실수를 했을 때 나 자신에게 욕을 했다.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볼펜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별 것 아닌 일에도 그랬다. 네가 그럼 그렇지, 이때다 싶어 온갖 비난을 퍼붓곤 했다.
이게 나로 끝나면 다행인데 타인을 향하는 일도 많았다. 티비를 볼 때도 출연자들의 흠을 찾아내고 비난하기 바빴다. 쟤는 왜 저렇게 생겼지? 쟤는 왜 저것도 못하지? 내가 해도 저것보단 낫겠네.
정작 내 자아는 나도 모르게 쪼그라들어 가고 있었다. 나설 용기는 없으면서 타인을 까내리며 우월감을 느끼는 일에 중독되어 갔다. 무슨 일이든 나는 일단 하지 않을 이유부터 찾았다. 남들 앞에 서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두렵고 토할 것 같았다.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난도질할 테니까.
숨 쉬듯 불안했던 나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단지 세상은 위험한 곳이고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내가 뭐라고.'
'나는 왜 이것도 제대로 못하지?'
'저 사람 나 때문에 기분 나빠진 거 아니야?'
마음의 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서슴없이 뱉기도 했다. 사는 게 괴로울 땐 술을 진탕 마셔 불편한 마음을 외면했다. 취한 나는 진짜 내 모습보다 그럴싸하니까. 지키지 않을 다짐을 남발해도 되니까. 몽롱한 정신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게 좋았다. 하지만 다음 날 술이 깨면 더 우울하고 수치심마저 들었다. 온통 후회뿐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 엄마가 우리를 두고 떠난 적이 있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의 시간이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밤에 내 앞에서 말없이 울던 아빠를 보며 슬펐던 기억, 돌아온 엄마의 머리가 많이 자라 있어서 그랬는지 반갑기보다는 어색했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엄마 껌딱지였던 어린 나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그때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매일이 슬프고 두려워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 마음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내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기로 선택했던 것 같다.
'감정 무시하기'를 생존법으로 선택한 나는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그 방법을 고수했다. 감정이라는 불편한 것을 내 깊은 곳 어딘가에 묻어두고 돌보지 않았다. 그렇게 '녹슨 마음'으로 살다 보니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졌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기도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영혼이 없다거나 기분을 알 수가 없다는 얘기를 했다.
상담을 받고 알게 됐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가짓수가 굉장히 적다는 것과 다채로운 감정들 중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의 강요'로도 이어져 왔다는 것을.
감정을 무시한 대가로 나는 '수치심'을 얻었고 '자기혐오'를 반복하며 '화'가 가득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위험한 상태였다. 남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인정만을 갈구했고 만족 없는 삶에 분노하고 있었다. 아마 나는 그대로 살았다면 가족도 일도 모두 잃었을 것이다.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는 어떨 때 기분이 좋은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 기분이 어떤지도 한참 생각해야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동안 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안타까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수시로 내 안부를 묻는다. 적어도 나만큼은 내편이 되어주려고 노력한다. 추하고 비겁하고 못난 내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땐 화를 내고 울고 싶을 땐 운전하다가도 울고 기쁠 땐 활짝 웃는다. 조금 못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잘했을 땐 칭찬도 잊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이만하면 잘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나 스스로에게 해준 적 없던 말들을 자주 해주고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휴식하는 시간도 주고 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매일 틈나는 대로 기록한다. 감사 일기도 매일 쓰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막연히 불안하고 두려울 때가 많다. 감정을 좀 더 솔직하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도 더 연습이 필요하다. 다만 예전에 비해 삶이 가볍게 느껴져서 좋다. 좀 더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는 내가 되어 간다. 못하면 어때 일단 해보는 거지, 이런 마음으로 살게 된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이 아직 무서운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도 너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너한텐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마음껏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