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조리실에는 조리사가 둘 있다. 정년을 이미 넘긴 조리사,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리사. 두 사람 다 나이 60을 넘긴 베테랑 조리사라 음식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강남에서 나름 여유가 있는 어르신들이 식사를 하러 오는 이 공간에서 가끔 고급풍의 샐러드나 평상시 잘 먹지 않는 맛난 반찬이 제공되면 이런 음식 처음 맛본다며 어르신들의 칭찬이 자자한 수준이다.
공짜 식사 티켓이 생기지 않는 이상 가족들과는 절대 가지 않을 근사한 브런치 식당에 몇 번 가본 경험이 있는 나조차도 감탄을 하며 먹는 반찬이 있을 정도이니 이 정도면 이곳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더라도, 건강하고 맛까지 일품인 점심 식사로 퉁 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계약직 조리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음식 하나는 제대로 배우겠구나 헛된 꿈을 꾸었다. 조리사가 조리를 하는 동안 나도 내 할 일을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오전 근무 시작 전에 갖는 약 15분, 점심 식사 후 10분(길게 쉬면 15분)이 동료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그 시간 동안 조리사가 자신의 무기와도 같은 특급 레시피를 척척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여인네들의 슬기로운 수다 시간이 진행된다. 그 수다는 다름 아닌 미용에 관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더 이상 길지 않다는 것에 안도를 했다.
수다의 주제가 육체적인 노동의 고됨보다도 더 견디기 힘겨운 일이었음을 깨닫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피부미용이란 스스로의 만족과 자존감 회복을 위해 행해지는 줄만 알았다. 이곳에서의 피부미용이란 본인의 만족 및 자존감 회복은 물론이며 잡티 없는 피부를 가졌다는 피부 부심, 그리고 그렇지 못한 동료를 향한 잔소리의 도구로 쓰였다.
두 조리사는 자신들보다 한참 젊은 두 조리보조원의 얼굴 상태를 평가했다. 그럴만한 것이 60대인 조리사 둘의 얼굴 피부 상태가 50대인 두 보조의 피부보다 잡티 없이 깨끗했던 것이다.
첫째 타깃은 선배 조리보조원이었다.
나보다 수개월 일찍 들어온 선배 조리보조원은 얼굴에 잡티와 기미가 많은 편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른 직종으로 1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다고 하니 직장 다니느라 외모에 대한 신경은 조금 덜 쓴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보통의 50대 여성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들 챙기랴 살림하랴 거기다 직장 생활까지, 광대뼈에 넓게 자리 잡은 거무스름한 자국은 내게는 열심히 살아가는 중년 여성의 아름다운 훈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정년을 이미 넘긴 조리사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리사가 뜻깊은 조언을 주듯 말했다. 나를 포함한 두 조리보조원은 나이가 훨씬 많은 두 조리사의 이른바 의느님의 혜택으로 맑고 깨끗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침 조회를 할 때보다도 더 집중했다.
선배 보조는 실력이 좋은 피부과를 찾아 상담을 다니다가, 집과는 반대 방향에 위치한 한 피부과 병원을 선택해 시술을 받기 시작했다.
워낙 색소 침착이 많이 된 얼굴에 시술이 시작되니 한두 차례 시술에도 눈에 띄게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10회 시술권을 결제했다고 해서 나는 '선생님, 이제는 더욱 예뻐질 일만 남았네요'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다음 타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선배 보조의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내 얼굴의 피부 상태가 이 조리실에서 가장 형편없고 피부 부심자들이 노리는 타깃 1순위가 되어버린 것이다.
40대가 되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피부과에 다니면서 시술 좀 받으라는 뜻이었나. 여기서는 그렇게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기미만 아니라면 선배 조리보조원의 얼굴은 흰 편에 피부 결도 고운 편이었다. 잡티를 가리려고 이중 삼중으로 파운데이션을 사용한 내 얼굴은 잡티도 못 잡고 깊은 주름도 숨기지 못했다.
몇 차례 시술을 받아 밝아진 선배 조리보조의 얼굴을 향한 칭찬에 이어 내 얼굴을 2초간 빤히 바라보던 정년을 넘긴 조리사는 예고 없이 슛을 날렸다.
"여기 선생님도 좀 해야 되겠네."
그랬더니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리사가 그 슛을 받아쳤다.
"그래서 파운데이션 열심히 바르잖아!"
공교롭게도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 쪽에 선배 조리보조원과 정년을 넘긴 조리사,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조리사 등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슬기로운 얼평 시간이었다.
사실 나를 향한 피부 부심자들의 잔소리는 이미 나에게 2연패였다.
사건은 얼마 전 열린 강남구 거주 65세 이상
어르신들을 위한 가을 운동회에서 벌어졌다. 그날 하루는 조리실 직원도 스텝으로 동원되었다. 행사 시간이 다가오면서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공원으로 모였다.
나는 안내 데스크에 놓인 생수병을 하나 집으려고 데스크 가까이 가서 두리번거렸다. 내 앞에 서 있던 타 복지관 직원이 돌아서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신청하셨어요?"
순간 나는 요즘 말로 벙쪘다.
내 목에는 STAFF이라고 크게 쓰인 행사 스태프용 목걸이가 걸려 있었지만 그 직원은 그것을 못 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이 목걸이가 뒤집혀 있었나? 나는 목걸이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려 보았다. 목걸이는 STAFF라고 쓰인 부분이 정확하게 내 윗배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계속]